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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名詩 산책길 
· 분류 : 전자책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3805497
· 출판일 : 2024-03-04
· 분류 : 전자책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3805497
· 출판일 : 2024-03-04
목차
詩와 노래가 있는
향수
세월이 가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부모
실버들
초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산유화
개여울
못 잊어
먼 후일
그리워
해
이별의 노래
저녁에
낙엽
마을
쉽게 씌어진 시
물소리 바람 소리에
서시
별 헤는 밤
풀
간이역
내 마음을 아실 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나의 노래
고향
꽃
목마와 숙녀
꽃덤불
그리움
나그네
칠월의 편지
연가(戀歌)
사모
길차부
가을의 풍경
이름없는 여인 되어
흰 바람벽이 있어
알알이 익어 가는 詩人의 노래
껍데기는 가라
바다와 나비
성북동 비둘기
가을의 기도
눈물
절벽
성탄제
자화상
떠나가는 배
들길에 서서
꽃을 위한 서시
행복
폭포
낙화
국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설야
청포도
사슴
님의 침묵
저자소개
김광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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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서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을 펴냈다. 자오선 동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9년 지용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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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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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 송신동 14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한약방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가문이 기울면서 온 가족이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다. 1917년에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에는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 영문과에 입학해 당시 불문과 2학년생이던 이헌구(문학평론가)를 만나 함께 자취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교 조선인 동창회보인 ≪R≫지에 시 <모기장>을 발표해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9년에는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32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모교인 서울의 중동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부임해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이 시기에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서항석(徐恒錫), 함대훈(咸大勳),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 등의 문인들과 교유를 활발히 했다. 이때부터 각종 신문에 시와 평론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첫 시집인 ≪동경(憧憬)≫을 발간했다. 1941년에는 수업 시간에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 8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민족진영 문인들과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으며, 1946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일보≫의 사회부장을 맡아 언론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출판부장과 ≪민중일보≫의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일시적으로 미 군정청의 공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에 제2시집 ≪마음≫을 발간했다. 1950년에는 문예지에도 관심을 기울여 ≪문학≫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6·25동란으로 중단했다. 1951년 대통령 공보 비서관을 사임하고, 1952년에는 대전에서 발간되는 ≪대한신문≫의 사장에 취임했다. 1952년에는 경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다음 해에는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1955년에는 ‘한국자유문학자협회’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문예지 ≪자유문학≫을 창간해 문단의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1957년에는 제3시집인 ≪해바라기≫를 발간했다. 1958년에는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집 ≪서정시집≫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1959년 전국 ‘문화단체총연합회’의 상임 최고 위원과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61년에는 ‘한국 문인협회’ 발기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이사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많은 정성을 기울였던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휴간되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 고혈압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뇌출혈로 입원해 치병을 하다가 이듬해에는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발간했다. 이후 1971년에는 제5시집 ≪반응(反應)≫을 발간하고, 1974년에는 ≪김광섭 시 전집≫을 발간해 문학적 생애를 총 정리했다. 1976년에는 자전적인 문집 ≪나의 옥중기≫를 발간하고 그 이듬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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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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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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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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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곽산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한시와 민요를 접하며 시적 감성을 키웠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시인 김억을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20년 『창조』에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이후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진달래꽃」 등 서정시를 통해 민족의 한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했다. 그의 시는 전통적 민요의 리듬과 서구 시형의 감각을 결합해 한국적 서정시의 전형을 세웠다. 1925년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은 그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단아하고 절제된 언어로 민족적 슬픔과 사랑을 표현했다. 도쿄상업대학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후 생활고에 시달렸고, 1934년 12월 24일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소월시초』가 발간되며, 그는 오늘날 ‘한국 서정시의 상징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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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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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했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이후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으며 안영일 등과 연극을 했다. 1945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6 ~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부산, 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지냈다.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 제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출간했다.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쳤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보여 주었다. “내일의 시”, “미지의 시”를 향한 그의 실험 정신은 언제까지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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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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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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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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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하였다. 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고,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며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산악〉, 〈사〉,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주로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현대시학》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하였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 왔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시집으로 첫 시집 외에 《늪》, 《기》, 《인인(隣人)》,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시선》, 《김춘수전집》, 《처용》, 《남천(南天)》, 《꽃을 위한 서시》, 《너를 향하여 나는》 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세계현대시감상》, 《한국현대시형태론》, 《시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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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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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32년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46년 광주숭실중학교 교감으로 취임하면서 일제 말 중단했던 시작을 계속했다. 1960년 숭전대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김현승시초>, <김현승 시전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견고한 고독>(1968), <절대고독>(197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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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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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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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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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부친 박준필(朴準弼)과 모친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고성이지만, 본적지는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모량리(毛良里) 571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영종(泳鍾)인데 동시를 지을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계성중학교 재학 중에 동요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1933년, 윤석중(尹石重)이 편집하던 ≪어린이≫란 잡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이란 여성 잡지의 현상 공모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어릴 적에 누구나 애송했던 이 동요도 목월의 동시인 <얼룩송아지>를 가사로 하고 있다.
목월은 1939년 9월호에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로 첫 번째 추천을, 같은 해 12월에 <산그늘>로 두 번째 추천을, 그리고 1940년 9월에 <가을 어스름>과 <연륜(年輪)>이란 시로 세 번째 추천을 받고 공식적으로 시단에 등단했다. 후세에 남겨진 박목월(朴木月)이란 이름은 목월이 ≪문장≫지에 응모할 때 본인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작명할 때 아이디어는 수주(樹洲) 변영로(卞榮魯)와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에게서 따왔다. 수주의 나무 수 자를 나무 목으로 바꾸고 소월의 달 월 자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당시 출판계에 발이 넓었던 조풍연(趙豊衍)은 ≪문장≫의 추천 시인 몇 사람을 묶어 합동 시집을 내면 좋겠다고 을유문화사에 제의해서 ‘자연(自然)’을 공통분모로 시작을 하고 있던 박목월,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등 3인의 합동 시집을 기획하게 되었다. ‘청록집(靑鹿集)’이란 시집명은 목월이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6년 6월 6일, 해방 후에 처음 나온 창작 시집으로 ≪청록집≫이 간행되었다.
1947년 목월은 10여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에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으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산아방(山雅房)’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1950년 6월에는 ≪시문학≫ 창간호를 조지훈, 박두진, 이한직(李漢稷) 등과 함께 발행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창간호는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목월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휴전 후에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다가 1959년 4월 한양대학교에 부임해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1968년에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래 작고할 때까지 연임했다. 1955년에 시집 ≪산도화(山桃花)≫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에는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으로 서울시문화상을, 그리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 등을 편집하고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했다.
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 ≪심상≫의 발행인으로 1인 3역을 감당하던 목월은 과로가 쌓여 갔다. 당시 그는 이미 고혈압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다. 1973년 삼중당에서 ≪박목월 자선집(自選集)≫을 간행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무순(無順)≫을 발간했다. 한양대 교수직에서 퇴임한 목월은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인 1978년 1월, 서울 원효로의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장로 장립을 받은 지 약 두 달 만인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뒤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워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용인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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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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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56년 서울 세종로에서 생을 마쳤다. ‘마리서사’를 운영하며 문학 예술 언론인들과의 교분을 넓혀, 청년문학가협회 시 낭독회 참여, 국제신보 등에 신작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종군기자로도 활약했다. 신문사 퇴직 후 당시 우리나라 최대 화물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을 다녀와 「아메리카 시편」 등을 발표했다. 모더니즘 경향의 동인지 『신시론』 앤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참여했다. 1955년 개인 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했다. 1956년 3월 17일부터 사흘간 ‘이상(李箱) 추모회’를 열어 폭음 끝에 3월 20일 9시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만 30세, 시력(詩歷) 10년이었다. 1976년 10주기를 맞아 장남인 박세형 씨가 추모 시집 『목마와 숙녀』를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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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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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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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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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가작으로 입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듬해 7월, 교육평론사에 근무하며 4.19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의 시를 엮어 『학생혁명시집』을 펴낸다. 여기에 「아사녀(阿斯女)」라는 시를 싣는다. 그 후 1963년 시집 『아사녀』, 1966년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1967년 서사시 「금강」, 라디오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 등을 발표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1961년부터 8년간 명성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문예반 및 교지 『성원(星苑)』을 지도했으며, 1968년에는 백병동 작곡가와 함께 학생들을 위한 오페레타 <석가탑>을 상연한다. 오페라 <아사녀>, 서사시 「임진강」 등을 구상했으나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완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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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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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이다. 시인이자 한학자였던 조부 신제하(辛濟夏)와 부친 신기온(辛基溫) 슬하에서 당시(唐詩)와 한학을 공부하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후, 1930년에 상경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국어국문학과에서 불전(佛典)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 데뷔,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김기림 등과 함께 순수시를 전개한다. 1931년에는 1년 남짓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청구원(靑丘園)’에서 도연명의 시와 매창 시집 등을 애독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한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인문사)을 간행한 이후, ≪슬픈 목가≫(낭주문화사, 1947), ≪빙하≫(정음사, 1956), ≪산의 서곡≫(가림출판사, 1967), ≪대바람 소리≫(문원사, 1970) 등 생전에 도합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신석정은 시인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해방이 되던 해 잠시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1946년 낙향한 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46년 40세 때부터 1950년 5월까지 부안 중학교와 죽산 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1952년 ≪태백신문≫ 편집 고문으로 위촉되어 <토요시단>을 주재한다. 1954년부터 7년간 전주고등학교에서 근무, 이듬해 1955년부터 전북대학교와 영생대학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했다. 1961년 5월, 5·16 직후 당시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연행되어 수일 만에 석방된다. 그해 전주고교를 떠나 김제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 전주상업고등학교로 부임해 1972년 8월 정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수필 <병상의 이 여름>(서울신문, 1974. 7. 4)을 마지막으로 집필, 7월 6일 영면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5권과 이병기와 공저한 ≪명시조 감상≫(박영사, 1958), ≪한국 시인 전집≫(신구문화사, 1959), 번역서 ≪중국 시집≫(정양사, 1954) 등이 있다. 이외에 유고 수필집으로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지식산업사, 1974),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작과비평사, 2007)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 1973년 제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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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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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였다.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월북하였고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성벽(城壁)』, 『헌사(獻辭)』, 『병(病)든 서울』, 『나 사는 곳』, 『붉은 깃발』, 『에세닌 시집(詩集)』과 「백석론(白石論)」, 「자아(自我)의 형벌(刑罰)」 등의 다수의 평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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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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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아버지 유준수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형인 극작가 동랑(東朗) 유치진과 함께 도쿄 교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무렵 유치진이 주도한 토성회(土聲會)에 참여해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6년에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귀국해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20세의 나이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해에 통영 지역 문인회가 간행한 ≪참새≫ 제2권 1호에 <단가(短歌)> 9편을 발표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원에 다녔다. 이해 10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安東) 권씨(權氏) 재순(在順)과 결혼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 구사노 신페이 등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해 형 유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발간했다. 이해에 그의 장녀 유인전이 태어났다. 1930년 유치진의 이름으로 ≪소제부 제1시집≫이 발간되었고 여기에 유치환의 시 <오월(五月)의 마음> 외 25편이 수록되었다. 1931년 24세에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해에 차녀 유춘희가 태어났다.
유치환은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아 폐업하고 시작(詩作)에 전념하게 되었고, 3녀 유자연이 태어났다. 1934년 다시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에 1년간 근무했다. 1937년 통영으로 이주해서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시 동인지 ≪생리(生理)≫를 부산에서 발행했다. 1939년 12월, 32세의 나이로 첫 시집 ≪청마시초≫를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간행했다. 이 첫 시집에는 <기빨> 외 53편이 수록되었다.
유치환은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에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8월 15일 광복 이후인 10월에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46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에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해 6월에 시집 ≪생명의 서≫를 행문사에서 간행했고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1948년 3월 통영여자중학교를 떠나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에 시집 ≪울릉도≫, 1949년 5월에 시집 ≪청령일기≫를 행문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이주했고 문인구국대를 조직해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1951년 9월에는 문예사에서 종군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1953년 4월에는 ≪예루살렘의 닭≫을 간행했다. 그는 1953∼1954년에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냈으며 1954년 4월, 47세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10월에 시집 ≪청마시집≫(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이 문성당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1954∼1957년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1955년에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 3월에는 경상북도 제1회 문인상을 수상했으며 1957년 50세의 나이로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57년 12월에 시집 ≪제구시집≫을 한국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58년 2월에는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2월 ≪유치환 시선≫을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었으며 산문집 ≪동방의 느티≫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경주고등학교 교장을 사임했으며, 12월에는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신흥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60년 12월에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동서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1년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2년 7월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2월에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63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이 되었으며, 산문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평화사에서 간행했고, 7월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4년, 57세에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이 되었고 그해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평화사에서 간행했으며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5년 4월에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으며,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1월에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평화사에서 간행했다. 1967년 2월 13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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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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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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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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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명학교와 동광학교·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소설 「12월 12일」의 발표를 시작으로 이후 일문시 「이상한 가역반응」·「조감도」 등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인 창작에 나서게 된다. 1933년 각혈로 배천온천에 요양을 가서 금홍을 만났으며, 서울에 돌아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녀와의 삶을 바탕으로 「지주회시」·「날개」·「봉별기」를 썼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하였으나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15편 연재로 그만두게 된다. 1935년에는 성천을 기행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촌여정」과 「권태」를 내놓게 된다. 1936년에 『시와 소설』을 편집하였고, 「날개」를 발표하여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위독」·「동해」·「종생기」 등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0월에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실화」·「동경」 등을 창작하였다. 1937년 2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었으며,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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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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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3년 귀국하여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고, 1937년에는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시동인 《자오선》을 펴냈다. 대표작으로 〈황혼〉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이 있다. 1941년 폐결핵으로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위해 힘썼다.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었고, 1944년 1월 베이징의 일제 지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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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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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 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귀국 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0년에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서 활동했고, 1939년에는 《문장》의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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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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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문과 경전을 통달했고, 14세에 조혼했으나 집을 나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출가했다.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접한 뒤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수정과 공약삼장 작성에 기여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0년대에는 『유심』지를 창간하고, 1925년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해 상징적 언어로 독립정신을 노래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불교를 통한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1944년 영양실조로 입적했다. 그의 삶은 수행자이자 저항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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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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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
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
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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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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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대구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의 2남으로 출생했는데, 가정은 부유했으나 7세 때 부친이 별세해, 어머니의 인자하고 후덕한 성정과 백부 이일우의 엄격한 훈도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 이일우는 인품과 재력을 갖추었으며, 민족정신을 선도하고 국민 계도에 앞장선 지사로서, 이상화로 하여금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한문 수업을 받게 했다. 백부를 통해 이상화는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화의 형인 이상정이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가계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이상화는 17세에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함께 대구에서 ≪거화(炬火)≫라는 습작집을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구에서 백기만과 더불어 독립운동 거사 모의에 참여하나 사전에 누설되어 서울로 피신, 박태원의 하숙에 기거하게 된다. 이해 10월 서한보의 장녀 서온순과 결혼했다.
1922년, 빙허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된 이상화는,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To___>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마음의 꽃>을 게재하게 된다. 이들 시에는 식민지의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오는 좌절, 권태, 우울, 애수 등이 불덩이 같은 정열로 분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는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도일했는데 도쿄 체류 기간인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는 문단에 대단한 주목을 불러일으킨다. 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낭만적 상상력과 유미주의의 극한” 또는 “낭만적 에로티시즘의 정화” 또는 한국 데카당스 문학의 전형으로 미학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에는 당시 이상화가 대구에 본처를 둔 상태로 유보화와 사랑에 빠진 일 등 20세 초 청년기에 체험한 사랑과 열정, 일제의 질곡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강박 관념, 불안 심리, 성애의 원죄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조기에는 ‘데카당이즘’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절망을 다룬 시편들을 주로 창작한다.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1924년 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1925년 2월, 무산 계급 문예 운동 단체인 ‘파스큘라’에 참석하고, 1925년 8월 결성된 카프에 가담하면서 창작기의 절정기를 이룬다. 이상화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시 34편, 평론 7편, 단편 2편, 감상문 4편 등 50여 편의 각종 시문을 남겼다. <가장 비통한 기욕> <이해를 보내는 노래> <빈촌의 밤> <조소> <가상> 등에는 일제의 압제와 착취 아래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의 빈궁상을 보여 주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과 저항의식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화는 <무산 작가(無産作家)와 무산 작품(無産作品)>과 같은 급진적인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카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이상화의 한계 지워진 계급투쟁 의식은 <가상> <조소>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비를 다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6년 가을, 연인이었던 유보화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1927년, 이상화는 향리인 대구로 낙향해 카프나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서울 생활을 청산한 이상화는 대구에서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애정 행각을 벌이고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해 작고하기까지 14년간 침묵기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신간회에서 출판 간사직에 있던 이상화는 여러 차례 가택 수색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낙향기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침체는 그가 처한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화가 1934년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은 것도 실의와 좌절의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부터 약 3개월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난 후, 이상화는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해,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사회에 봉사하게 된다. 이에 대륜중학의 건립에 이상화의 숨은 공로가 지대했다고 전한다. 이상화의 이러한 사회적 헌신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민족의 광복을 성취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충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의 아호 ‘백아(白啞)’는 어둡고 불구적인 식민 치하의 고통을 실의와 자조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40년, 이상화는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며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프랑스 시 평역 등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43년 4월 25일, 불치의 병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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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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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경북 안동 출생.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이 입선되어 등단.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 및 문과대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며 목월문학상, 인촌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시집 <성탄제>, <하회에서>, <황사현상>, <달맞이꽃>, <해가 많이 짧아졌다>, <해거름 이삭줍기>와 시론집 <시론>, <진실과 언어>, <시에 대하여>, <시와 시인들>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역시집 <20세기영시선>, 영역 한국 한시선 <Slow Chrysanthemums>, 영역 김춘수 시선 <The Snow Falling on Chagall’s Village>와 영시론집 <현대의 영시>, 시론선집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있다.
2005년 제2회 이육사 시 문학상
2005년 제5회 고산문학상
2007년 제8회 청마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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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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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1949년에 17세의 나이로 조연현의 추천을 받아 <문예> 지에 시 〈비오는 날〉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1950년에는 각각 서정주와 모윤숙의 추천으로 〈코스모스〉, 〈강가에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총 세 번의 추천을 받아 국내 최연소 시인이 되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한 대학생 시절부터 기자로 생활했으며,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를 거쳐 〈대한일보〉 정치부·문화부 부장, 〈국제신문〉 편집국 국장 등을 역임했다. 오랜 기자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부산산업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시집 《적막강산》 《돌베개의 시》 《꿈꾸는 한발》 《풍선심장》 《보물섬의 지도》 《심야의 일기예보》 《죽지 않는 도시》 《절벽》 《존재하지 않는 나무》, 수필집 《서서 흐르는 강물》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평론집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성》 《시와 언어》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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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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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에서 출생. 본관은 한양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동국대학교(당시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고풍 의상>, <승무>, 1940년 <봉황수>로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오대산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거쳐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하였고,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194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8년에 사망하였고, 1972년에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었으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 『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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