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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C 세트 (교과서 수록 작품 Ⅱ)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39411
· 쪽수 : 5192쪽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39411
· 쪽수 : 5192쪽
책 소개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인 문학전집이 수험생 독자를 위해 더 섬세한 기준으로 재구성되었다. 문학 연구자 중에서도 해당 저자의 전공자이자 대학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교수진이 책임 편집자로 참여하였다.
목차
탈출기
무녀도
독 짓는 늙은이
만세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불꽃
운수 좋은날
화수분
사랑
사랑손님과 어머니
잔등
불신시대
저자소개
김동리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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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193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되고, 1935년과 1936년에는 각각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와 「산화(山火)」가 당선되었다.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예술원상(1958),3·1문화상(1967), 국민훈장 동백장(1968), 서울특별시문화상(1970)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등신불』 『무녀도』 『황토기』 『귀환장정』 『사반의 십자가』 등이 있다. 199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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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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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일본산고』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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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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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을 마다하지 않은 모더니스트, 경성의 모던 보이 구보 박태원.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일본 호세이대학 법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짧았지만 일본 유학은 그의 예술적 경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21세 『신생』 10월 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순문학적 목표로 결성된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의 구인회에서 문학적, 예술적 교류를 활발히 했다. 이후 1934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신문에 연재, 1936년 소설 「천변풍경」을 발표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경성의 세태를 문학에 담아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월북했다. 1962년 대하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986년 『갑오농민전쟁』 등을 집필하였다. 1986년 북한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월북을 이유로 분단 이후 그의 작품은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와 함께 다시 국내 문단과 독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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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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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43년 경성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로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1955년 「신세계」에 단편'귀신'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One Way', '테러리스트'를 발표했다. 1957년 단편 '불꽃'이 「문학예술」 신인작품 모집에 당선되었고, 이 작품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8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화재', '보복', '오리와 계급장' 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일보 및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196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KBS 방송자문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아세아신문재단으로부터 고재욱 언론상을 수상했고,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부산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불꽃>, <반역>과 장편소설 <사도행진> <노다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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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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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난다. 중인 계층의 서울 토박이라는 계층적 특징은 염상섭 문학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그의 소설에서는 풍부한 서울말의 흔적과 근대적 삶에 대한 예민한 현실 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관립 사범 학교를 중퇴하고 보성학교 중학 과정을 수학하던 중 1912년 염상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맏형의 도움으로 교토(京都)부립 제2중학을 마치고 이후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예과 1학기를 다니다 자퇴한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발생한 3·1 운동의 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3월 19일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원에서 단독적으로 독립 선언을 주재했으나 거사 직전 검거된다. 약 3개월간의 수감 후에는 요코하마의 복음(福音)인쇄소에 취직해 직공 노릇을 한다. 이 시기 경험한 양가적 경험, 즉 ‘근대 그 자체로서의 일본(문학)에 대한 의식’과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이후 염상섭 문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구체화된다.
1920년 1월 ≪동아일보≫ 기자로 임명된 염상섭은 귀국해서 정경부 기자로서 활동하다 1920년 7월 사직한다. 염상섭은 ≪폐허≫ 창간호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봄까지 오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에 몸담기도 한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고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24년 ≪시대일보≫에 발표된 ≪만세전≫은 염상섭 문학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문학적 성취는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이뤄진 두 번째 일본 유학과 결부되어 보다 심화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일본 유학 중에도 염상섭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혈통, 혼혈)를 밀도 있게 다룬다.
1928년 2월 귀국해서 ≪이심≫, ≪광분≫ 등을 연재하는 것에 이어 마침내 1931년 ≪삼대≫를 발표한다. 1920∼1930년대 발표된 염상섭의 작품들은 식민지 근대의 문제를 탐구하며, 식민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에 관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이를 깊이 있는 문제의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 성격을 나타낸다. ≪삼대≫ 이후 염상섭은 ≪백구≫, ≪모란꽃 필 때≫, ≪불연속선≫ 등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지만, 이들 작품은 앞선 시기의 작품들에 비해 통속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30년대 중반 염상섭은 돌연 만주행을 선택한다. 진학문의 권유로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며, 1939년 만주 안동 대동항 건설 사업 선전에 종사한다. 이 기간 중 염상섭은 장편 소설 ≪개동≫을 집필하고, 안수길·박영준 등의 창작집 ≪싹트는 대지≫와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北原)≫ 등의 서문을 쓴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창작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약 10여 년의 기간 동안 그는 일종의 ‘문학적 단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해방된 서울로 돌아온 염상섭은 <해방의 아들>을 발표하며 다시금 문학 활동을 이어 가고, ≪경향신문≫ 창간 당시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기도 한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곧이어 마주하게 된 ‘해방 이후’ 식민지의 모순, 미소 분할과 신탁 통치, 남북 분단 등의 혼란한 사회 현실의 모습을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삼팔선>, ≪효풍≫ 등의 작품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 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만 염상섭은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9·28 서울 수복, 10·25 중공군 개입, 1951년 1·4 후퇴의 혼란 속에서, 염상섭은 윤백남, 이무영 등과 함께 해군에 입대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부산과 서울 정훈감실에서 해군 소령으로 복무한 뒤, 1954년 5월 임시 중령으로 전역한다. 전쟁의 발발과 폐허가 된 전후(戰後)의 현실 등과 같은 역사적 비극 앞에서, 염상섭의 소설은 일상적 삶의 감각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발표되는 일련의 후기 작품들은 주로 남녀 연애담에 기반한 결혼과 가족의 문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에서 타계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의 삶은 서울에서 마무리된다. ‘작가’ 염상섭이 남긴 빛나는 작품들은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염상섭은 평생에 걸쳐 작품 창작에 임하고,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붙들었던 작가였다. 그가 보여 주는 치열한 소설 쓰기의 모습은 시대를 헤쳐 나가는 염상섭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로서 정립되어 가는 한국 문학사 그 자체의 역사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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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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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매우 중요한 작가이면서,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그는 『무정』, 『재생』, 『흙』, 『유정』,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본격 장편소설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소설의 ‘제1형식’을 창출하였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조선문단』, 『동광』 등의 한글 잡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필 활동을 펼침으로써 현대 ‘한국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단종애사』, 『이순신』, 『세조대왕』, 『원효대사』, 『사랑의 동명왕』 등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는 시대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화함으로써 민족적 위기의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기억을 소설의 장에 옮겨 민족적 ‘자아’를 보존하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성립을 증명한 『무정』의 작가요, 도산 안창호의 유정 세계의 꿈을 이어받은 사상가요,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한 민족운동가요, 민족적 ‘저항’과 ‘대일협력’의 간극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처절한 생애를 살아간, 험난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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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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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호는 여심(餘心). 평양 출신. 시인 주요한(朱耀翰)의 아우이다.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평양의 숭덕소학교, 중국 쑤저우 안세이중학, 상하이 후장대학 부속중학교를 거쳐 후장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중국의 베이징 푸렌대학, 경희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국제PEN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했다. 1921년 단편소설 「이미 떠난 어린 벗」 「치운 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인력거꾼」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 39편의 단편소설, 「첫사랑 값」 「미완성」 등 4편의 중편소설, 『구름을 잡으려고』와 『길』(1953) 등 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영문 중편소설 「김유신(Kim Yu-Shin)」(1947), 영문 장편소설 『흰 수탉의 숲(The Forest of the White Cock)』(1962)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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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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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전 해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여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위문 협착증을 앓던 그는 대수술 중에 과다 출혈로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으로 규정된다.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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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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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 출생이며, 호는 빙허(憑虛)이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조 중학 4학년을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가 후장 대학에서 수학한 뒤, 1919년 귀국하였다.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21년 「빈처」로 문명을 얻었다. 같은 해 조선일보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백조』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당시,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인하여 동아일보를 떠난 후,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다. 빈궁 속에서도 친일 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1943년 장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장·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 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과 비평문 등을 남겼다.
작품 경향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사실주의 계열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전적 신별 소설과 하층민의 민족적 현실에 눈을 돌린 소설, 역사 소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 「무영탑」과 「적도」를 비롯하여 단편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운수 좋은 날」 등 다수가 있으며, 창작집 『조선의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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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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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黃順元, 1915~2000)은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먼저 시인으로 등단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7년경으로 1940년 첫 단편집 『늪』을 출간했다. 그 후 『목넘이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학』(1956), 『잃어버린 사람들』(1958), 『너와 나만의 시간』(1964), 『탈』(1976) 등의 단편집과 『별과 같이 살다』(1950), 『카인의 후예』(1954), 『인간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4), 『움직이는 성』(1973), 『신들의 주사위』(1982)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인의 전통적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특히 한 편의 시 같은 단편 「소나기」는 그 서정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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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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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11세 때부터 보동학교, 대성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 때부터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공부하여 고등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19년, 26세 때 김동인, 주요한 등과 함께 문예지 「창조」를 발간했으며,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창조」를 중심으로 하여 '혜선의 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단편 및 중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화수분'은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1927년 목사가 되어 각종 목회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 교수와 「기독신문」의 주간을 지냈다. 이후 국립맹아학교 교장, 중앙신학교 교수, 「한국복음신문」등의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1968년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종교적 색채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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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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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앙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다. 1934년 호세이 대학 문과를 수료한 뒤 귀국하여『조선일보』에「초」「가을」「실솔」「시(詩)」「단장(短杖)」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했고, 1936년 비평가 백철의 추천으로『조광』에「탁류」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같은 해 4월에 호세이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다. 1941년『문장』에「습작실에서」를 발표한 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해방 직후 귀국하여 1945년 12월 27일 홍명희, 임화, 박태원, 김기림 등과 함께 ‘경성조소문화협회(京城朝蘇文化協會)’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하는‘전국문학가대회’에 참석하며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첫 소설집 『잔등』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월남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렀고, 1958년 니콜라이 두보프의「고독」을 번역했다는 것 외에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12월 27일 홍명희, 임화, 박태원, 김기림 등과 함께 ‘경성조소문화협회(京城朝蘇文化協會)’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 뒤 월북한다. 10월에 ≪문장≫ 속간호에 <역사(歷史)>를 연재하다 중단한다. 이 소설이 현재까지 확인된 허준의 마지막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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