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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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푸시킨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소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친러시아적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정교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다. 10대에 러시아 낭만주의 문화를 접하기도 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해 하급 관리로 생활하면서 낭만주의적인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를 발표한다. 이 설화집은 푸시킨, 주콥스키 등 당시 최고 문인들과 벨린스키 같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고골은 이내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는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을 수행하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 교사와 역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키예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에 지원하는데,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작가로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1835년 초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 『미르고로드(Mirgorod)』와 문화-역사 비평 에세이들로 구성된 『아라베스크(Arabesques)』를 출간하고, 1836년에는 희곡 「감찰관(Revizor)」과 단편 소설 「코(Nos)」를 발표하면서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독자와 관객들이 「감찰관」을 사회 풍자 혹은 가벼운 소극(笑劇)으로만 인식하고, 일부 관객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하는 데 상처를 받고 1836년 말 유럽으로 떠나 1848년까지 로마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842년에 장편 소설인 『죽은 혼』 1부를 발표했으며 이후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에 정착하여 종교적인 정진에 힘쓰면서 2부에 전념하여 1851년 완성본을 탈고한다. 고골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정교 수도사에게 『죽은 혼』 2부의 평을 부탁했으나 부분적으로 미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낙담해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고골은 정교의 대정진 기간에 금식을 극단적으로 수행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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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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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9월 9일 러시아 툴라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 손에 자란 톨스토이는 16세에 카잔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형식적인 교육에 실망해 그만두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오가며 방황하던 톨스토이는 1851년 형 니콜라이를 따라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복무하면서 〈어린 시절〉 등 자전적 삼부작을 발표해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850년대 후반에는 농민들의 열악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교육에 있다고 판단, 야스나야 폴랴나 농민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교육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병행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평론을 썼으며,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자기완성과 악에 대한 무저항, 사적 소유 부정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기초하여 《고백》 《인생에 대하여》 《예술론》 등을 저술하고 당대 러시아 사회와 종교를 강렬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압박을 받았지만, 모든 걸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러시아 황제와 달리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러시아 황제로 불릴 만큼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만년에 이르러 술·담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농부처럼 입고 노동하며 생활했다. 생전에 수많은 톨스토이주의자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몰려와 농민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조용한 피난처를 찾아 집을 나선 며칠 후, 1910년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가출은 현실에 대한 극복이자 다른 삶을 향한 마지막 도전으로 상징된다. 작가이자 폭력을 거부한 평화사상가, 농민교육가이자 삶의 철학자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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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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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고리키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고리키는 여섯 살 때 글을 배우고, 1877년 1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열 살이 되던 해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1881년 ‘선’이라는 배에서 접시닦이를 하던 그는 글을 모르는 주방장 스무리에게 책을 읽어 주며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고골, 네크라소프, 뒤마, 발자크,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힘든 노동과 미래에 대한 절망을 느낀 그는 1887년 19살이 되던 해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만성적인 폐결핵을 앓게 된다.
그 후 고리키는 코롤렌코의 서기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 자연과학, 니체 이론 등을 공부하고, 1891년 러시아를 여행하며 칼류즈니를 만나 그의 권고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892년 9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마카르 추드라> 이후, 여러 단편들을 계속해서 발표하던 고리키는 여러 신문에 평론이나 칼럼을 쓰며 정치 문제를 다루게 된다. 1898년에는 단편 20편과 수필을 모은 책 ≪수필 및 단편집≫을 출간해 문학적 명성을 얻었으나, 지속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고리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가열되는 학생 데모와 파업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들을 탄압하는 정부를 비파해 세 번째로 수감된다. 톨스토이는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고리키는 감옥에서 <바다제비의 노래>를 발표해, 이 작품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혁명의 노래처럼 불리게 된다. 1902년 ≪소시민≫과 ≪밑바닥에서≫가 초연되고, 1904년 ≪별장족들≫을 저술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05년 1차 혁명을 목격하고 차르 정부를 비난하고 결국 유형을 당한다. 1906년에는 차르 정부의 러시아 차관을 차단하는 활동을 해 러시아로의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 1913년까지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정착한다. 1913년 로모소노프 가문 300주년 기념 특사로 사면을 받은 고리키는 페테르부르크로 가 문학·정치 활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기를 권유받게 되며, 1913년 영구 귀국 할 때까지 이탈리아의 소렌토에 살게 된다.
다난하고도 복잡한 삶을 살아 온 막심 고리키는 1936년 6월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68세의 일기로 자신의 생애를 마쳤다. 이틀 후 스탈린 등의 국가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그의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크레믈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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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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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소설가 겸 희곡작가로 활동하며 만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창작 활동에 할애한 인물이다. 완벽주의자적 성향으로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했던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의과 대학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1차세계대전 당시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고향 키예프에서 짧은 기간 동안 의사 생활을 하다 1921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1년 「치치코프의 모험(Похождения Чичикова)」을 시작으로 「소맷동에 쓴 수기(Записки на манжетах)」(1923), 「디아볼리아다(Дьяволиада)」(1923) 등을 잇달아 발표해 유명해졌다. 불가코프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백위군(Белая гвардия)」(1922-1924)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불가코프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십분 살려 단편 모음집 『젊은 의사의 수기(Записки юного врача)』(1925-1926)를 발표했다. 의학적 소재는 비슷한 시기에 쓰여 불가코프의 사후에 출판된 『개의 심장(Собачье сердце)』(1987)에도 반영되어 당대의 의료 현실을 둘러싼 환경을 날카로운 풍자로 풀어냈다.
1930년대에 들어 불가코프의 작품은 출판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불가코프의 많은 작품이 그의 사후에 출판된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불가코프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소비에트 정권에 사정한 끝에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후 ‘볼쇼이 극장(Большой театр)’으로 이직하여 번역가 겸 대본 작가로 근무하게 된다. 말년의 생계는 주로 번역으로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정권의 탄압과 업무 스트레스는 불가코프가 앓고 있던 고혈압의 악화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을 계속 이어 갔고 세상을 떠나기 3주 전까지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Мастер и Маргарита)」(1967) 작업에 매달렸다. 불가코프는 1940년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하여 노보데비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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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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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1867년, 타간로크의 김나지야에 입학하지만 수학 및 지리 성적이 부진하여 낙제하고, 13세 무렵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와 「햄릿」, 「검찰관」 등의 연극을 관람하며 예술에 흥미를 느낀다. 1876년 4월,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며 일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안톤 체호프는 계속 고향에 남아 고학으로 김나지야를 마친다. 1879년,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고, 1882년부터 오 년에 걸쳐 주간지 《오스콜키》에 약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한다. 1884년, 의사로 개업한 뒤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정부의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거울」(1885) 등 풍자적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1886년 두 번째 객혈과 1888년 소설가 가르신의 자살 등 힘겨운 사건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다. 그럼에도 체호프는 1890년 사회적 참여와 영감을 얻기 위해 사할린섬으로 떠나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멜리호보라는 마을에 정착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호프는 문학적 원숙기에 접어들고, 1899년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소설 「결투」(1892),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을 비롯해,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1896)를 발표한다. 그 뒤로 「바냐 아저씨」(1897), 「세 자매」(1900), 「벚꽃 동산」(1903) 등 여러 걸작들을 연이어 집필한다. 1904년, 기나긴 숙환 탓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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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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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푸시킨(1799∼1837)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인 1811년 6년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그는 리체이 재학 중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질료나야 람파)’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해 러시아 남부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그는 남러시아의 캅카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풍의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뇨프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인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 ≪도둑 형제≫ 등을 발표했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이 마을에 푸시킨의 집이 있고, 이 마을의 어귀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음)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느라 1825년에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한다. 그는 1830년 가을 볼지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즉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돌의 손님>, <질병 때의 주연> 등 많은 작품을 쓴다. 1828년 겨울 새해 무렵에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한 푸시킨은 이듬해 봄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당하지만, 다시 청혼해서 결국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지노 마을(아버지가 80채의 농가, 246명의 남자 농노, 237명의 여자 농노가 사는 이 마을을 물려주어 푸시킨이 젊은 지주가 됨)을 방문해 그곳에서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 등을 집필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만을 좋아할 뿐,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신의 아내와의 염문이 떠도는 중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는다. 그는 1836년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한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황제의 염문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자인 프랑스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837년 1월 7일 사망한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한다.푸시킨은 ‘러시아 문화의 등불’,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국민(민중)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러시아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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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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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중앙아시아의 작은 마을 레베잔에서 태어났다. 뻬쩨르부르그 대학 재학 중 볼셰비끼 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1905년 체포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몰래 뻬쩨르부르그로 잠입하여 동 대학의 조선학과를 졸업했다. 1911년, 지방의 거칠고 가난한 삶을 풍자한 단편 '지방 생활'을 발표, 2개월 동안 3백여 편의 서평을 받으며 주목 받는 데뷔를 했다.
1914년에는 시베리아 주둔군의 생활을 그린 <변경에서>의 출간으로 역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군대에 대한 중상모략이라 간주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1917년 혁명 이후에는 고리끼와 블로끄, 쉬끌로프스끼 등 당대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열렬한 문학 활동을 펼쳤으나 새로운 소비에뜨 사회에 걸었던 기대와 열정은 곧 불안과 혐오로 바뀌었고, 자먀찐은 다시 작품 활동을 통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1932년 파리로 망명하여 계속해서 작품 활동에 전념, 역사 소설 <천벌>을 집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 1937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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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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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 러시아 고전 문학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작가로 여겨진다. 보로네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3년에는 러시아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부닌의 작품은 러시아어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후가 아닌, 살아생전에 명성을 떨쳤던 흔치 않은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이다.
김나지움을 중퇴했지만, 친형의 지원과 노력으로 집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신문사 편집국에 입사했다. 부닌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수많은 시, 단편소설, 평론 등을 발표했다. 1897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첫 시집 『세상 끝으로(На край света)』를 발표했고 이듬해 두 번째 시집 『열린 하늘 아래서(Под открытым небом)』가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을 읽은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부닌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했고 수많은 찬사를 쏟아냈다. 1900년에 발표한 시집 『낙엽(Листопад)』도 좋은 반응을 얻어 1903년에는 이 시집으로 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가 제정한 푸시킨 문학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부닌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 오데사,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 등지를 거쳐 1920년 3월 파리로 망명했다. 특히 1918년 오데사에서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의 실체를 폭로한 회고록 「저주받은 날들(Окаянные дни)」을 쓰기 시작하여 1920년에 발표했다. 이 회고록과 1925년에 발표된 단편 「일사병(Солнечный удар)」은 러시아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Никита С. Михалков)가 2014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 〈일사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부닌은 프랑스 망명 중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여 「예리코의 장미(Роза Иерихона)」(1924), 「미짜의 사랑(Митина любовь)」(1925), 「아르세니예프의 인생(Жизнь Арсеньева)」(1930), 「어두운 가로수길(Тёмные аллеи)」(1937-1945, 1953) 등을 발표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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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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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슈 근교의 역참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철도노동자의 맏이로 태어난 작가는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철도대학에서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고, 시와 산문을 쓰면서 문학에 몰두했다.
스탈린 체제가 견고히 자리를 잡아가던 1920년대 후반 플라토노프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 시대의 초상을 그려냈다. 『체벤구르(Чевенгур)』, 『코틀로반(Котлован)』 등의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 하지만 동시대 유토피아의 허상을 겨냥한 날카로운 풍자는 문단 안과 밖 권력자들의 눈에 거슬렸고, 작가는 스탈린의 직접적 비난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1930년대 플라토노프는 창작을 계속했지만, 문단의 주류로부터는 점점 멀어졌다.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플라토노프는 최전선에서 전쟁을 목격하고 증언했다. 이때의 작품들은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보다는 전쟁을 추동하는 힘에 주목하고 있다. 전후 발표된 중편 소설 「귀향(Возвращение)」에서 플라토노프가 그려낸 귀향을 망설이는 이바노프 대위의 모습이 사회주의 전사의 긍정적 전형에 적합하지 않다며 작가는 다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제대로 지면조차 얻지 못한 채 타격을 입은 작가는 1951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플라토노프에 대한 평가는 사후 점차로 바뀌었는데, 초기 단편 작품들과 ‘전쟁 산문’ 작품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전쟁 산문’은 인류사 가장 비극적인 전쟁인 2차세계대전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자 악과 증오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관찰로,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플라토노프는 완벽히 복권되었으며,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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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바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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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지금은 우크라이나인 오데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상업 교육과 유대 경전 교육을 받았으나 음악과 문학에 이끌렸다. 독일, 루마니아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1920년에는 종군기자로 부됸니 장군의 제1기병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1920년 이후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병대≫(1926)에 수록되게 될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고, 오데사에서의 청년기의 경험들은 ≪오데사 이야기≫(1931)의 소재가 된다.
산문 외에도 프랑스 문학 작품의 번역가로도 활동했고, 희곡 <일몰>(1928), <마리야>(1935), 그리고 시나리오와 수필, 논문을 다수 남겼다. 바벨은 1939년 특별한 이유 없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1940년 1월 총살되었다. 1954년 소련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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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소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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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 모스크바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어문학부에서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시: 미학적 · 도덕적 이상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한 단계 높은 러시아어』(공저) 『한국 근대문학의 러시아 문학 수용』(공저), 번역서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우리 짜르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독』 『아저씨의 꿈』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전쟁과 평화』(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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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섭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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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 『체호프 단편선』 『체호프 희곡선』 『누구의 죄인가』 『영화기호학』 『영원한 남편 외』(공역) 『무도회가 끝난 뒤』(공역) 『메이예르홀트의 연출세계』(전4권, 공역) 『매일 다샤 언덕을 지나며』(공역)가 있고, 지은 책으로 『고전 강연 7』(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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