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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사람들

잊지 못할 사람들

(일본 단편 16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리시마 다케오, 이즈미 교카, 오쿠라 데루코, 기쿠치 간, 구니키다 돗보, 사카구치 안고, 다자이 오사무, 모리 오가이, 호리 다쓰오, 요코미쓰 리이치 (지은이), 일본어번역세상 (옮긴이)
천년의시작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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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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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잊지 못할 사람들 (일본 단편 16선)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 ISBN : 9788960212305
· 쪽수 : 231쪽
· 출판일 : 2014-12-12

책 소개

구니키다 돗보 등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들의 단편 16선을 엮어 번역한 단편집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귤」 「라쇼몬(羅生門)」 「여체(女體)」등 일본 근대 단편소설의 정수라 할 작품들이 실려 있다.

목차

일러두기 ― 6

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7
다카세부네(高瀨舟) 모리 오가이 ― 13
만개한 벚꽃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 27
도박 기쿠치 간 ― 57
아내의 화원 요코미쓰 리이치 ― 64
장밋빛 볼 호리 다쓰오 ― 88
외과실(外科室) 이즈미 교카 ― 101
라쇼몬(羅生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116
바다를 안고 싶다 사카구치 안고 ― 126
여체(女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139
비겁자 아리시마 다케오 ― 142
어느 부부 모리 오가이 ― 151
출세 기쿠치 간 ― 163
I can speak 다자이 오사무 ― 177
파란 보자기 오쿠라 데루코 ― 181
잊지 못할 사람들 구니키다 돗보 ― 205

지은이 약력 ― 224
옮긴이 후기 ― 229

저자소개

기쿠치 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다이쇼에서 쇼와시대에 걸쳐 활약한 소설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실업가이다. 가가와현(香川県) 출신으로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과 제3, 4차 <신사조(新思潮)>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무명작가의 일기(無名作家の日記)」, 「다다나오경행장기(忠直卿行狀記)」로 데뷔하였으며, 희곡 「아버지 돌아오다(父帰る)」(1917), 「은혜와 원수의 저편에(恩讐の彼方に)」(1919) 등을 발표하였고, 「진주부인(真珠夫人)」(1920)을 비롯한 50편에 이르는 장편 통속소설에 의해 신현실주의 문학의 새 방향을 열었다. 종합지 <문예춘추(文藝春秋)>를 창간하고 일본문예가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아쿠타가와상(芥川賞)과 나오키상(直木賞), 기쿠치간상(菊池寛賞)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사 다이에이(大映)의 초대사장으로 영화사업에도 관여하는 등 ‘문단의 거물’로 불리었다. 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등 신진문학자를 원조하며 신인의 발굴, 육성 등에 공헌하였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문예총후운동을 발안하였으며, 1939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제정하여 조선의 작가나 총독부 관리와 접하면서 조선문단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직 추방을 당한 상태에서 1948년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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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다자이 오사무(일본어: 太宰 治, 1909년 6월 19일 ~ 1948년 6월 13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1936년(쇼와 11년)에 첫 작품집 『만년(晩年)』을 간행하였다. 1948년(쇼와 23년)에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山崎富栄)와 함께 다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 투신자살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달려라 메로스(원제: 走れメロス)」, 「쓰가루(津軽)」, 「옛날 이야기(お伽草紙)」, 「사양(斜陽)」, 「인간실격」이 있으며, 사카구치 안고・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이시카와 준(石川淳) 등과 함께 신희작파(新戱作派)・무뢰파(無賴派) 등으로 불린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일본어: 津島修治)인데, 필명을 쓴 까닭은 쓰가루 지방(아오모리현 서부) 출신인 스스로가 본명을 읽으면 쓰가루 방언의 영향으로 지시마(チシマ)로 들리지만 이 필명은 방언투로 읽어도 발음이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 아버지는 공무로 늘 바빴고 어머니는 병약했으므로, 다자이 자신은 유모 등의 손에서 자랐다. 1916년(다이쇼 5년)에 가나키제일심상소학교(金木第一尋常小學校)에 입학하였다. 4년만인 1922년(다이쇼 11년) 4월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력 보충을 위해 현지 4개 마을에서 조합으로 세운 메이지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에 다시 1년간 통학하였으며,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靑森中學校)[2]에 입학하는데, 입학 직전인 3월에 다자이의 아버지가 도쿄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 4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에 입학하지만, 높은 수준의 강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마음껏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 혐오, 내지 다자이 자신의 처한 위치와 더불어 마르크시즘에 심취해 갔고, 당시 치안유지법에서 단속하고 있던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느라(다만 공산주의 사상 자체에 진심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의조차 대부분 출석하지 않았다. 또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5월부터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제자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본명인 쓰시마 슈지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대학은 거듭된 유급에 수업료 미납으로 제적된다.[5] 재학 중에 만나 동거하던 술집의 여급으로 유부녀였던 18세의 다나베 시메코(田部シメ子)와 1930년 월에 가마쿠라의 고시고에(腰越) 바다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혼자 살아남았다. 이 일로 다자이는 자살방조 혐의로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형 분지(文治) 등의 탄원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6] 「인간실격(人間失格)」, 「앵두(櫻桃)」를 마무리한 직후 1948년 6월 13일, 타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서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山崎富栄)와 동반자살하였다.[14]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 사건은 발표 직후부터 온갖 억측을 낳았는데, 도미에에 의한 억지 정사설, 희극 심중 실패설 등이다. 다자이가 생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 중이던 유머 소설 「굿 바이」도 미완의 유작으로 남았는데, 공교롭게도 13화에서 작가의 죽음으로 절필되었다는 데에서 기독교의 징크스를 암시하는 다자이의 마지막 멋부림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의 유서에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다' 등의 취지가 적혀 있었는데, 자신의 컨디션 저조나 다운증후군을 앓는 저능아였던 외아들의 처지에 대한 비관도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기성 문단에 대한 '선전포고'로까지 불리던 다자이의 연재 평론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마지막회는 다자이 사후에 게재되었다. 유해는 스기나미 구 호리노우치에서 화장되었다. 계명(戒名)은 문채원대유치통거사(文綵院大猷治通居士)였다. 다자이의 사체가 발견된 6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는데,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와도 관련해, 생전에 다자이와는 동향으로 교류가 있던 곤 간이치(今官一)에 의해 '앵두 기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날은 다자이 문학의 팬들이 그의 무덤이 있는 도쿄도 미타카시의 젠린사(禪林寺)를 찾는 날이기도 하다. 또한 다자이가 태어난 아오모리 현 카나기마치에서도 '앵두 기일'에 맞춰 다자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다자이의 탄생지에서 다자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옳다는 유족의 요망도 있어 다자이 오사무 탄생 9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는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로 이름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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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문호로, 일본 문학사와 의학사에 동시에 족적을 남긴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다. 에도시대 말 영주의 주치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유교적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한편, 독일 유학을 통해 서구 학문과 예술로 의학적,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이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린타로(林太郞)라는 본명으로는 위생학을 전문으로 한 군의관으로 육군 군의총감과 의무국장 자리에까지 올랐고, 퇴역 후에는 넓은 식견을 인정받아 궁내성 제실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제실미술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오가이라는 필명으로는 번역과 평론을 시작으로 소설, 시가, 희곡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일본 근대 문단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요컨대 오가이는 문학자요 의학자며 군인이자 관료로 종횡무진 활약한 일본 근대 지식인이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으로는 「무희」, 『기러기』, 『청년』, 『아베 일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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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안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의 문학가.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炳五へいご).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와 함께 일본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無賴派)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평가된다.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시절부터 방랑벽과 방황이 심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 소설가 데뷔. 단편소설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후 1946년 2차대전이 끝난 후 패전 직후의 시대를 분석한 '타락론'과 '백치'로 당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된다. 1931년에 발표한 1932년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직접 [明治開化 新十郎探偵帖]을 쓰기도 했다. 이를 원작으로 한 UN-GO가 애니메이션화되었고, 2020년 5월에 NHK에서 시대극으로 드라마화한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추리소설을 썼고, 매스컴에서 스캔들에 대해 서투른 추측를 하면 아예 내 밑으로 들어와서 추리 소설을 배우라고 일갈한 적도 여러번 있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작품은 『투수살인사건(投手殺人事件)』, 『난킨무시살인사건(南京虫殺人事件)』, 『그림자 없는 살인(影のない犯人)』, 선거 살인사건, 불연속 살인사건 등이 있다. 시인 나카하라 츄야와 가까웠다. 사카구치 안고는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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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0년대 낙관적 이상주의를 구가했던 ‘시라카바(白樺)파’의 동인으로 기독교와 톨스토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홋카이도의 삿포로 농학교 시절 금욕적 청교도 생활을 실천하며 완벽한 영적 생활을 추구했지만, 더욱 강하게 솟구치는 성욕으로 인해 그의 내면은 영과 육으로 분열되어 갈등하게 된다. 미국 유학 시기, 영육을 모두 긍정하는 휘트먼에 공감하고 크로폿킨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다. 귀국 후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지 못하고 극도의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침내 교회를 탈퇴하고 부모에게 상속받은 홋카이도의 방대한 농장을 소작인에게 나눠 주고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가는 데 매진한다.아리시마는 시라카바파 중에서도 계급적 모순과 여성의 해방 등 사회 문제에 주목했다. 선과 악, 영과 육을 동등하게 긍정하며 자유인을 지향하고 ‘본능적 삶’을 갈구했다. ‘남녀의 사랑이 절정인 순간에 죽는다’고 했던 아리시마는 1923년 유부녀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 동반 자살한다. 대표작으로 <어떤 여자의 초상(或る女のグリムプス)>(1911∼1913), <선언>(1915), <카인의 후예>(1917), <돌에 짓눌린 잡초(石にひしがれた?草)>(1918), <어린 것들에게>(1918), <태어나려는 고뇌>(1918), ≪어떤 여자≫(19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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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교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메이지 시대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오자키 고요 중심의 ‘겐유샤(硯友社, 벼루 동인)’ 작가다. 어머니는 전통 가면극 노(能)의 큰북 고수의 딸로 교카가 9세 때 사망했다. 11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부처의 부인 마야(摩耶) 신앙을 갖기 시작했다. 18세에 고요의 문하생이 되어 사사한 이래 평생의 은인으로 존경했다. ≪고야산 스님(高野聖)≫으로 인기 작가가 되었다. 괴기 취미와 특유의 낭만주의에 의해 일본 근대 환상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야간 순경(夜行巡査)≫, <외과실(外科室)>, ≪데리하 교겐(照葉狂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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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다쓰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3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나 192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사받았다. 1929년 도쿄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파 문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불안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신선한 심리주의적 묘사라는 문학 세계를 꿋꿋이 고수했으며,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생을 발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소설(私小說) 중심이었던 당시 일본 소설의 흐름에서 ‘지어낸 이야기(픽션)’로 낭만파 문학 형식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말기부터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전후에는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로 요양하다 1953년 사망했다. 시의 감수성을 지닌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성가족(聖家族)』 『아름다운 마을(美しい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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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2년 일본 도쿄의 시타마치에서 태어났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해 차석으로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를 발간하고 〈라쇼몬〉, 〈코〉 등을 발표했는데, 〈코〉가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문단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의 작풍으로 시대를 풍미했으나 말년에는 자신의 삶을 조롱하는 자조적인 작품들을 많이 썼다. 서른다섯 살 되던 해인 1927년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일본 근대사에서 관동대지진과 견줄 만큼의 사회적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35년 일본 출판사 문예춘추의 사주이자 아쿠타가와의 친구였던 기쿠치 간이 아쿠타가와 상을 제정, 현재까지도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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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쓰 리이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8년, 후쿠시마 현(福島縣)에서 태어났다. 1917년 ≪문장세계≫에 <신마(神馬)>를 투고한 것을 시작으로, <활화산>, <불> 등을 발표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사소설적인 소재가 많았다. 이후 <파리>, <태양>, <마르크스의 심판>, <옥체> 등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신진 작가로서 빛을 발했다. 1928년 이후 <눈에 보인 이>, <신감각파와 코뮤니즘 문학> 등을 통해 유물론적 문학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대항 의식을 표면화했다. 그러나 1930년, 심리와 감각의 얽힘이 두드러진 <새>와 <기계>를 발표함으로써 신심리주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1936년 유럽 여행 경험을 토대로 서양 사상과 일본의 고신도(古神道), 그리고 과학과 일본 사상을 다룬 장편 소설 ≪여수(旅愁)≫의 신문 연재를 시작한다. 1945년 야마가타 현(山形縣) 소개지에서 패전을 맞이했는데,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전시하의 답답한 심경을 그린 ≪밤의 구두≫와, ≪우아한 노래≫를 출판한다. ≪여수≫를 미완으로 남긴 채, 1947년 단편 <남포등>을 집필하던 중 위궤양과 복막염으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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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라 데루코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에게 사사받고 「어머니」 「형」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결혼 후 외교관인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아서 코넌 도일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후 탐정소설로 전환하게 되고, 1935년 단편집 >춤추는 실루엣>을 발표하면서 일본 최초의 여류 탐정소설가로 데뷔했다. 장편소설로는 「살인 유선형」 「여자의 비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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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키다 돗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 편집자였으며, 지바 현에서 태어나 히로시마 및 야마구치 현에서 성장하였다. 초기에는 소설과 시를 병행하다가 점차 소설에 몰두하였으며, 「무사시노(武藏野)」 「소고기와 감자」 등의 낭만적인 작품을 쓴 이후에 「봄 새」 「싸리문」 등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부인화보(婦人畵報)>를 창간하였으며, 편집자로서도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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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번역세상 (옮긴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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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옮긴이 후기]

경찬수
역사소설 쪽으로 눈길이 갔다.
워낙 강렬해서 내 몸의 곳곳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글이었다.
내내 설레고 벅찬 마음으로 작업을 해서 이제는 문신처럼 내 몸이 되었다.
그래서, 온몸으로 느끼며 치열하게 읽어 주시기를 당부드린다.
오랜 기간 한국번역가협회에서 가르쳐 주시고 지난여름 세상을 떠나신 정순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김윤석
기쿠치 간이 실업가로도 크게 성공하여 일본의 2대 문학상(芥川賞, 直木賞)을 제정하고, 작가들의 복지 증진과 신인 발굴에 힘을 써 일본문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배경에는 학생 시절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본인이 고향의 재력가의 도움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세」에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한 두 사람이 모두 성공하여 재회하는 감동이 잘 그려져 있고, 「도박」에는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 새사람이 되는 이야기로, 두 작품 모두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함께한 여러 학우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노영애
아픈 곳이 어딘지 더듬게 만들었던,
「만개한 벚꽃나무 숲 아래」
서늘한 새벽에 마주했던 사카구치 안고의 문장들,
그리고 조심스럽게 두드렸던 자판.
같이 공부한 스터디, 한 분 한 분의 온기로, 작은 시작이지만 가능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박외숙
마음 맞는 좋은 벗과 가슴 설레는 작품들이 있어 무더위도 시원하게 날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곧 눈이 내리겠지요. 사랑했던 마지막 잎새를 다 떨군 겨울나무가 쓸쓸하지 않은 것은, 새봄에 돋아날 잎과 꽃을 기다리는 희망 때문일 겁니다.
저희 단편소설집이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구에게는 희망이 되고, 또 누구에게는 따뜻한 감동이 되길 바랍니다.

방계정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여자아이가 튼 손을 쭉 내밀고 힘차게 흔드는가 싶더니, 햇살에 물든 황금빛 귤 대여섯 개가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 머리 위로 순식간에 흩어져 떨어졌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 변두리 건널목에서 참새들처럼 소리치던 세 명의 사내아이들, 그리고 그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선명한 황금빛의 귤…….
빛바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먹먹하고도 아련한 한 폭의 풍경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귤」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가난이 있었지만, 슬픔과 아픔, 절망은 없었다. 많은 것이 흘러넘치는 지금의 삶, 기포처럼 메워지지 않는 공간이 나에게도 있는 것은 아닐까?

이재랑
아름다운 한 여인과 의대생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깊은 사랑에 빠지고, 진한 감동을 지닌 채로 수술실에서 환자와 의사로 재회한다. 그리고 함께 세상을 떠난 이 연인들을 작가만의 개성 있는 표현과 문체로 풀어내어 독자로 하여금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만든다. 백 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찻잔 앞에 앉기만 하면 여전히 그들이 생각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나를 진지한 문학 세계로 인도해 준 큰 작가 이즈미 교카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라다 시즈카(原田?香)
평생 처음 한글이란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던 2004년부터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치렀던 한글 받아쓰기 시험에 힘들었던 날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알수록 어렵고 신기한 이웃 나라 언어, 한국어는 여전히 나를 매혹시키고 있다. 초심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갈대가 되고 싶다.
실력도 경험도 많이 부족한 저를 항상 도와주고 예뻐해 주시는 선배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아키야마는 화롯불의 재를 쑤시고 쇠주전자 속에 차갑게 식은 간빙을 찔러 넣었다.
“‘잊지 못할 사람이란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 보게, 내가 이 원고의 첫머리에 써 놓은 게 이걸세.”
오쓰는 아키야마 앞에 그 원고를 살짝 내밀었다.
“그렇지? 그래서 먼저 이 말을 설명해 보겠네. 그러면 저절로 이 글의 내용을 알게 될 걸세. 벌써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런 소리 말고, 얼른 읊어 보셔. 나는 그냥 독자인 셈치고 들을 테니까. 그럼 실례! 누워서 들어야지.”
아키야마는 담배를 물고 드러누웠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오쓰의 얼굴을 보면서 눈가에는 미소를 띠우고 있다.
“말하자면, 부모 자식이나 친구와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 외에도 고마우신 스승이나 선배 같은 사람들을 단순히 ‘잊지 못할 사람들’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네,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해야 할 걸세. 그런데, 가르침을 받거나 사랑을 베푼 사이도 아니고 서로 간에 의리도 필요 없는, 생판 남이어서 잊어버린다 해도 정(情)이든 의리든 깨질 게 없는데도 쉽사리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네. 보 통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말 못 해도, 적어도 내게는 있다네. 아마 자네에게도 있을 걸세.”
아키야마는 말없이 끄덕였다.
―구니키다 돗포, 「잊지 못할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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