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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사랑의 여러 빛깔)

가와바타 야스나리, 스탕달, 아르투어 슈니츨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알퐁스 도데, 토머스 하디, 테오도르 슈토름, 윌리엄 포크너,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바실리 악쇼노프 (지은이), 이문열 (엮은이)
살림
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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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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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사랑의 여러 빛깔)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5577335
· 쪽수 : 334쪽
· 출판일 : 1996-06-30

책 소개

글이 막힐 때마다 젊은 시절 읽은 세계 명작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는 작가는 세계문학사에 남을 명작 1백 편을 사랑, 죽음, 비장미 등의 각 주제별로 선정하고, 모두 1천5백 장에 이르는 작품 해설을 각각의 작품 뒤에 붙여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그렸다. 이 책들은 문학적 지향점을 찾지 못한 우리 문단에 자극제가 될 만한다. -조선일보

목차

F.R.샤토브리앙: 르네
테오도르 슈토름: 호수
안톤 체홉: 귀여운 여인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를 위한 장미
토마스 하디: 환상을 쫓는 여인
바실리 악쇼노프: 달로 가는 도중에
알퐁스 도데: 별
아르투르 슈니츨러: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가와바다 야스나리: 서정가
스탕달: 바니나 바니니

저자소개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9년 오사카 출생. 어려서 부모를 잃고 조부모의 손에 자랐으나 할머니와 누나, 할아버지를 연이어 여의고 중학생 무렵 고아가 되었다. 그로 인해 마음에 드리워진 짙은 허무와 고독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 기쿠치 간의 동의하에 제6차 《신사조》를 창간하고 이듬해 《초혼제일경》으로 등단하며 신감각파 작가로 주목받았다. 1924년 졸업 후 《문예시대》를 창간, 〈이즈의 무희〉, 《설국》 등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필체가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근대 서정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문예간담회상, 기쿠치간상, 노마문예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문화훈장,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일본 고유의 미를 살린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68년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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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 근대 소설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스탕달은 남프랑스의 도피네 지방의 수도 그레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더욱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이것이 후의 그의 인생관인 자기중심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1799년 17세 때 이공대학 입학시험을 치루기 위해 파리로 올라갔으나 수험은 하지 않고 관극과 극작 에 몰두하였다. 다음해 친척인 드가류 백작의 주선으로 프랑스육군성에 들어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참가하여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 제정하에서 경리관, 사정관으로 있다가 참의원 서기... 프랑스 근대 소설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스탕달은 남프랑스의 도피네 지방의 수도 그레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더욱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이것이 후의 그의 인생관인 자기중심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1799년 17세 때 이공대학 입학시험을 치루기 위해 파리로 올라갔으나 수험은 하지 않고 관극과 극작 에 몰두하였다. 다음해 친척인 드가류 백작의 주선으로 프랑스육군성에 들어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참가하여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 제정하에서 경리관, 사정관으로 있다가 참의원 서기관을 지내고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이탈리아로 건너가 7년 동안 밀라노에서 살았는데, 이 기간에 자유의 문학자들과의 교우, 메치르데와의 불행한 사랑 등 그의 문학에 결정 적인 작용을 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1821년 그가 이탈리아 경찰로부터 위험인물의 혐의를 받고 밀라노를 떠나 파리에 돌아와 쓴 것이 ≪연애론≫이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작품은 전집으로 70여 권에 이르며 이것은 “잉크로 종이를 새까맣게 물들이는 것만이 가장 큰 쾌락”이라는 그의 말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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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62년 5월 15일 유대인 후두 전문의 요한 슈니츨러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제 슈니츨러의 아들로 빈 프라터가에서 태어났다. 1879∼1884년 빈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1885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친교를 나누면서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간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빈의 여러 병원에서 보조 의사로 근무했다. 작품 활동 초기인 1890년부터 1899년까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함께 ‘빈 모더니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슈니츨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상과 세기말 현상을 비판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친이 사망한 뒤 전업 작가가 되어 단막극 연작 〈아나톨〉을 비롯해 단편 〈죽음〉(1894), 단막극 〈사랑의 유희〉(1895)를 연이어 발표한다. 1897년에는 열 개의 대화로 구성된 단막 연작 〈윤무〉를 발표하지만 검열로 인해 공연 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어 단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발표했다. 1899년부터 작품 활동 중기에 해당되는 1921년까지, 슈니츨러는 심리학적 주제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다룬 극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초록 앵무새〉(1899), 소설 《구스틀 소위》(1900)가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03년 여배우 올가 구스만과 결혼한다. 1908년 첫 장편 《트인 데로 가는 길》을 집필한다. 이 작품에서 빈 사회를 살아가는 유대인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1911년 발표된 유일한 희비극 〈광활한 땅〉은 슈니츨러 극작품 중 공연 측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로 뒤이어 발표된 〈베른하르디 교수〉(1912)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5막 희극으로, 검열법에 따라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이혼 이후 슈니츨러는 심리적 고립감과 건강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한동안 세기말 개인의 운명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한 단편들을 포함 소설 집필에 주력한다. 1923년에는 오스트리아 펜(PEN) 클럽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뒤이어 소설 《엘제 양》(1924), 소설 《꿈의 노벨레》(1925)를 연이어 발표한다. 1926년 슈니츨러는 부르크극장의 명예 반지를 받는다. 1928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 《테레제. 여성의 삶의 연대기》를 발표한다. 1931년 10월 21일 빈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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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60년, 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1867년, 타간로크의 김나지야에 입학하지만 수학 및 지리 성적이 부진하여 낙제하고, 13세 무렵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와 「햄릿」, 「검찰관」 등의 연극을 관람하며 예술에 흥미를 느낀다. 1876년 4월,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며 일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안톤 체호프는 계속 고향에 남아 고학으로 김나지야를 마친다. 1879년,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고, 1882년부터 오 년에 걸쳐 주간지 《오스콜키》에 약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한다. 1884년, 의사로 개업한 뒤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정부의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거울」(1885) 등 풍자적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1886년 두 번째 객혈과 1888년 소설가 가르신의 자살 등 힘겨운 사건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다. 그럼에도 체호프는 1890년 사회적 참여와 영감을 얻기 위해 사할린섬으로 떠나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멜리호보라는 마을에 정착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호프는 문학적 원숙기에 접어들고, 1899년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소설 「결투」(1892),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을 비롯해,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1896)를 발표한다. 그 뒤로 「바냐 아저씨」(1897), 「세 자매」(1900), 「벚꽃 동산」(1903) 등 여러 걸작들을 연이어 집필한다. 1904년, 기나긴 숙환 탓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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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남프랑스 님에서 출생.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업이 파산하여 중퇴하고, 알레스에 있는 중학교 사환으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857년 형이 있는 파리에 가서 문학에 전념하며 시집인 《사랑에 빠진 연인들 Les Amoureuses》을 발표, 이것이 당시의 입법의회 의장 모르니 공작에게 인정받아 비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학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 그 후에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친교를 맺은 문인들과 더불어 자연주의의 일파에 속했으나 선천적으로 민감한 감수성, 섬세한 시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적인 면이 넘치는 유연한 문체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고향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주제로 하여 인상주의적인 자신만의 작풍을 세웠다. 그의 문장은 보여 줄 것이 많은 예술가의 문장이자 시니컬하면서도 동정심을 담은 시인의 문장이다. 익살스런 농담에서부터 더없이 섬세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재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학자들부터 군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매혹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경험담으로 작품에 활기를 부여할 줄 알았던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빛바래지 않은 다양한 작품으로 ‘아름다운 문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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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 (지은이)    정보 더보기
《테스》와 《귀향》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다. 1840년 6월 2일 도체스터 근방 하이어보캠프턴에서 석공인 아버지와 독서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 남부의 웨섹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 도체스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당시 도체스터는 농촌 지구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긴 했으나 다소 외진 곳으로, 하디의 어린 시절에는 철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농촌 풍경, 농촌 사람들의 미신이나 풍습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은 훗날 그가 소설을 쓰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1910년에 국왕으로부터 공로대훈장을 받았고, 1920년과 1925년에 각각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애버딘·브리스틀 대학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저택 맥스게이트에서 많은 유명 인사들을 접견하기도 한 하디는, 1925년에는 황태자의 방문까지 받는 영예를 누렸다. 1928년 1월 11일, 하디는 플로렌스에게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시편을 읽어 달라고 부탁해 이를 듣고선 밤 9시경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심장은 도싯의 스틴스퍼드 교회에 있는 에마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하디의 대표작으로는 웨섹스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란의 무리를 떠나》, 《귀향》, 《숲의 사람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테스》, 《무명의 주드》 등이 있고, 장편 극시 〈제왕들〉 외에 많은 웨섹스 시편들이 있다. 하디의 작품들은 특정 지역, 즉 영국 남부 지역 농촌을 다루고 있어 지방색이 강하지만 결코 지역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그의 소설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적 가치들과 당대의 핵심적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 특출한 작가적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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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슈토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세기의 서정시 시인이며 단편소설 작가인 테오도어 슈토름은 1817년 9월 14일 독일 북부의 해안도시 후숨에서 법률고문관의 부유한 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동안에는 네 살 때 벌써 사설 초등학교에 다니는 등 안락한 나날을 보낸다. 1826년부터 1835년까지 후숨의 인문계 9년제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는데, 마지막 3학기 동안에는 뤼벡의 신(新)인문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한다. 여기서 시를 쓰고, 고대시를 모방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으로 산문을 써 보기도 한다. 후숨에서는 그저 프리드리히 실러만 알고 그에 머물러 있었는데, 여기 뤼벡에서는 괴테뿐만 아니라 아이헨도르프나 하이네 등 저명한 작가들의 “보다 고귀한”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다고 한다. 1833년, 이 시기 후숨에서 발표된 《에마에게(An Emma)》가 그의 첫 시집이다. 1837년부터는 키일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베를린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1대학 생활 동안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훗날의 작품 〈임멘 호수〉와 〈대학에서〉 등 여러 단편소설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테오도어 몸젠, 티코 몸젠 형제와 사귀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의 전설과 동화와 노래 등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당시의 운문에도 친숙해지며 문학지 《유럽(Europa)》(1840)에 자작시를 발표하며, 시인 뫼리케 등과도 어울려 1843년에 《세 친구의 가요집(Liederbuch dreier Freunde)》을 출판한다. 1842년 법학고시에 합격하나, 시험이 끝난 후 노름으로 많은 빚을 안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1843년 4월 중순에 후숨에서 “볼트센-슈토름(Woldsen-Storm)”이라는 이름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1846년 사촌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나 결혼 1년이 지난 다음 도로테아 옌센과 사랑에 빠진다. 가족들의 압력으로 애인 도로테아가 후숨을 떠나게 되는데, 이 무렵의 슈토름의 연작시 《빨간 장미의 책(Ein Buch der roten Rose)》에 열정적인 시구들이 나타나고, 1855년에 창작된 단편 〈안젤리카〉의 여주인공도 이때의 애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슈토름은 작가라기보다는 법률가였으며, 무엇보다도 변호사와 판사로 일했다. 1848년 덴마크의 지배에 반항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민중 봉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친구 테오도어 몸젠의 요청에 따라 이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한다. 또 “애국자선협회”의 창립 동조자가 되고, 이에 대해 그 지방 신문에 기고하기도 한다. 1849년에는 덴마크 왕 프리드리히 7세에 대한 공작 신분을 박탈하고 인적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종식하라는 진정서에 서명한다. 그 후로 덴마크 관청이 슈토름의 분파적 성향을 비난하며 하급재판소의 변호사직 인가를 거부했을 때 베를린에서 그를 포츠담의 지방법원에 무보수로 임용하자 그는 이에 동의해, 1853년 포츠담으로 옮겨 그곳에서 근무한다. 이후 1856년 하일리겐슈타트 지방법원 합의부 판사에 임명된다. 과도한 판사 업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동아리(Singkranzchen)”라는 새로운 합창단을 구성하기도 하고, 단편소설 〈임멘 호수〉의 삽화를 그린 루드비치 피치 등의 친구들도 사귀며, 〈저편 시장(市場)에서(Druben am Markt)〉, 〈대학에서〉, 〈불레만의 집(Bulemanns Haus〉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과 창작 동화를 집필하기도 한다. 1864년 독일?덴마크전쟁에서 덴마크가 패하면서 슈토름은 후숨 신분제의회에서 주지사로 선출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음 해 5월에는 부인 콘스탄체가 세상을 떠나고, 상(喪)을 마친 다음 1866년 6월 13일 옛 애인 도로테아 옌센과 조촐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다음 해에 프러시아 행정 개혁의 합병 절차에 따라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방법원 재판관에 임명된다. 이 무렵 〈주정부위원의 아들들(Die Sohne des Senators)〉, 〈이중인간〉 등의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작가 활동도 계속하면서, 1877년부터는 스위스작가연맹의 동료 켈러와 서신교환도 한다. 1880년 5월에 63세의 나이로 조기에 판사직을 정년퇴직하고 하데마르셴으로 이주하여 양로원에 입주한 다음 건강에 해가 될 정도로 긴 여행을 한다.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서도 마지막 작품 《백마의 기수》를 완성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1888년 7월 4일 하데마르셴에서 질병으로 사망해, 고향 후숨의 성(聖) 유르겐 성당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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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사와 문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통해 세계 문학사의 지형을 바꾼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 미국 남부의 신화적 공간인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서사 우주를 구축했으며, 인간의 죄의식, 역사, 시간, 정체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1897년 미국 미시시피주 뉴올버니에서 태어난 포크너는 옥스퍼드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미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지프 콘래드, 제임스 조이스, 셀린,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다. 1차 대전 당시 캐나다 공군에 지원했으나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우체국 직원, 대학 행정직원, 작사가, 시인 등 다양한 일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9년 발표한 장편 『소리와 분노』는 포크너 문학의 전환점을 이룬 작품으로 몰락하는 남부 사회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그려냈다. 이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 등에서 더욱 급진적인 서사 실험을 이어나갔다. 포크너는 허구의 남부 군郡인 요크나파토파를 창조해 이 지역의 인물과 사건, 역사와 신화를 바탕으로 19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을 엮어 ‘하나의 문학적 우주’를 건설했다. 그의 세계에는 과거 남부의 영광과 노예제의 그림자, 전쟁의 상처, 백인과 흑인의 갈등, 빈곤과 몰락의 현실이 교차하며, 이 모든 것이 언어와 시간, 의식의 실험 속에서 구현된다. 그의 분열된 화자, 중첩된 시점, 복잡한 문체는 난해하다고 평가되지만, 이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구조적 시도였다. 1949년 “심오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는 선정 이유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작가는 사랑, 명예, 긍지, 연민, 희생, 인내 - 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1951년에는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여섯 개의 주제로 분류한 『포크너 자선 단편집Collected Stories of William Faulkner』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100편에 이르는 단편 중 포크너가 42편을 추려낸 이 단편집은 장편소설 속 서사 구조와 미시적 현실 묘사를 압축해낸 포크너 문학의 정수이자,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구성된 근대 미국인의 기억과 무의식의 지도이다. 그는 이 단편들 안에서 폐허와 침묵, 전쟁과 인종, 여성과 고통, 폭력과 슬픔을 주제로 남부 사회의 해체 과정을 치열하게 추적한다.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포크너의 장편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단편들은, 그의 문학적 실험이 단지 형식에 그치지 않고 미국 역사와 인간 조건에 대한 총체적인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포크너는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부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받았고, 라틴아메리카의 마르케스,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모두 그를 “자신들의 문학적 아버지”로 언급했다.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모옌 등도 포크너의 영향 아래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의 이야기를 문학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2년, 미시시피 옥스퍼드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미국 남부의 역사와 상처를 하나의 신화로 바꿔놓은 작가”로 남았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독자와 비평가를 불러들이며, 언어와 인간 존재, 그리고 서사라는 개념 그 자체를 묻는 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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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68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바닷가 도시 생말로에서 출생해서 콩부르 성에서 고독하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북아메리카를 여행한 뒤에 독일에 편성된 반혁명 망명 군대에 가담해서 부상당하고 병든 몸으로 영국으로 망명하여 온갖 고생을 하며 『혁명론』을 발간했음, 혁명이 끝난 후 귀국해서 영국에서 초고를 쓴 『아탈라』, 『르네』, 『그리스도교의 정수』, 『나체즈 사람들』을 마무리해서 발표했고, 그리스, 유대 지방, 이집트, 카르타고 유적지를 여행하고 『순교자들』,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기』를 썼음. 프랑스의 19세기 전기 낭만주의 문필가로서, 로마교황청, 베를린, 런던 대사와 귀족의회 의원, 외무장관을 역임한 정치가로서 다난했던 일생을 보내고, 노년에 자신의 자서전 『무덤 너머의 회상록』과 고행 수도사의 전기소설 『랑세의 생애』를 쓰고 1848년 파리에서 사망했음. 그의 유언에따라서 그가 태어난 생말로 바닷가의 암초 섬에 묻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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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경북 영양, 밀양, 부산 등지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그해 겨울」,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여러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독보적인 문체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특히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은 문단의 주목을 이끈 초기 대표작이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금시조』, 『시인』, 『오디세이아 서울』, 『선택』, 『호모 엑세쿠탄스』 등 다수가 있고, 『이문열 중단편 전집』(전 6권), 산문집 『사색』, 『시대와의 불화』, 『신들메를 고쳐매며』, 대하소설 『변경』(전 12권), 『대륙의 한』(전 5권) 등이 있으며, 평역소설로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가 있다.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 2024년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전 세계 31여 개국 24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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