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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걷는다

가만히, 걷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드니 디드로, 로베르 데스노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마르셀 프루스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스탕달, 알베르 카뮈, 알퐁스 도데, 알프레드 드 뮈세, 앙드레 지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조르주 상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폴 발레리, 폴 베를렌느, 폴 브루제,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프랑수아즈 사강 (지은이), 신유진 (옮긴이)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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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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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가만히, 걷는다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86372845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1-05-13

책 소개

《천천히, 스미는》(영미 산문선), 《슬픈 인간》(일본 산문선) 에 이어 출간된 이 책 《가만히, 걷는다》에는 근현대 프랑스 작가 스물한 명의 산문 서른여섯 편이 실려 있다. 대가들이 예민한 감각으로 일상에서 발굴해낸 “시간 밖에서 영원한 기쁨”의 순간들과 그들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담겨 있다.

목차

잠이 달콤한데
콜레트, <하루의 탄생>
콜레트, <선인장의 편지>
알퐁스 도데, <오렌지>
마르셀 프루스트, <봄의 문턱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발코니에 든 햇빛>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파리에서의 고독한 생활>
드니 디드로, <나의 오래된 가운을 버린 것에 대한 후회>

나의 어린 바다
프랑수아즈 사강, <어린 시절에 만난 부랑자>
마르그리트 뒤라스, <80년 여름, 첫 번째>
마르그리트 뒤라스, <80년 여름, 세 번째>
폴 베를렌, <네버모어>
폴 발레리, <지중해의 영감>
알퐁스 도데, <도착>
알베르 카뮈, <가장 가까운 바다>

아직 남겨진 말
알프레드 드 뮈세, <조르주 상드에게 보내는 편지>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 <에메랄드호의 최후>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 <모리타니를 그리며>
프랑수아즈 르네 드 샤토 브리앙, <가을의 기쁨>
프랑수아즈 르네 드 샤토 브리앙, <2년 동안의 광기>
폴 브루제, <진실한 감정>
로베르 데스노스, <밤의 가장 깊은 곳>
조르주 상드, <플로베르에게 보낸 편지>

시선이 머무는 곳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찰즈부르크의 모차르트>
샤를 보들레르, <바그너에게 보내는 편지>
샤를 보들레르, <예술가, 세계인, 군중의 인간 그리고 아이>
스탕달, <첫 만남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 <예술과 상업>
폴 발레리, <망자를 향한 두려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과거의 힘, 미래의 힘>
기 드 모파상, <권태>
앙드레 지드, <나르시스론>

다른 나라에서
기 드 모파상, <태양 아래에서>
앙드레 지드, <아민타스>
조르주 상드, <전장 중에 쓴 여행자의 일기>
알베르 카뮈, <과거가 없는 도시들을 위한 간단한 안내서>
프랑수아즈 사강, <눈 속에서 쓰다>

저자소개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21년에 부친이 수석 외과의로 있던 루앙 시립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 부속 건물에서 가족과 21년을 살았다. 죽음과 광기의 정서가 깊게 드리운 「분노와 무력」, 「정념과 정절」 등을 습작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파리의 법과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1844년 측두엽 뇌전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크루아세에 칩거하며 글쓰기에 전념했다. 브르타뉴 여행기 『들로 모래펄로』(1847)를 썼다. 심상 의학 소설 『성 앙투안느의 유혹』(1849), 『마담 보바리』(1857), 『살람보』(1862), 이 세 작품에서 소멸과 신경증의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1848년 혁명 세대를 다룬 『감정 교육』(1869), 희곡 소설 『성 앙투안느의 유혹』(제3판:1872), 단편집 『세 이야기』(1876) 등을 발표했다. 두 필경사 이야기 『부바르와 페퀴셰』를 집필하던 중 1880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고작 2부에 들어갈 『통념 사전』을 남겼다. 1856년 『르뷔 드 파리』에 6회에 걸쳐 연재한 『마담 보바리』는 12월 말 〈미풍양속과 종교에 위해를 가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1857년 1월 법정에서 검사 피나르는 사실주의적 회화 묘사 기법, 관능적 색채, 여주인공의 선정적 아름다움, 신성한 종교에 세속의 쾌락을 섞는 방식 등에 주목하였다. 이 소송 사건은 같은 해 보들레르의 『악의 꽃』 소송과 함께 현대 소설과 현대 시의 출현을 알린 최고의 문학 스캔들로 세계문학사에 기록되었다. 지방 농촌 마을의 일상과 비열한 현실 한가운데에서 상상력과 에너지, 유혹과 지배의 욕구를 품은 양성적 여성, 엠마 보바리가 그려 낸 저 너머를 좇는 환상의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 해부〉라는 19세기 정신 과학 연구에 도전한 결과물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욕망과 환상, 마음의 균열을 예리한 문체로 파고들며, 현대 소설의 새로운 기준을 세운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이자 영원한 고전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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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디드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철학자, 극작가, 소설가, 예술 이론가. 1713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태어났다. 랑그르와 파리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1732년 파리 대학에서 현재의 바칼로레아에 해당하는 문학사 자격을 획득했다. 1735년에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현재의 학사 학위에 해당하는 신학사 자격을 획득했으나 성직을 포기했다. 지적 방랑을 하던 끝에 샤프스베리의 『가치와 미덕에 대한 에세이』 등을 번역하면서 문필가의 삶을 시작했고, 이후 『맹인에 관한 서한』을 쓰면서 무신론적 경향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수많은 탄압과 검열, 분열 속에서도 20여 년에 걸쳐 『백과전서』의 책임 편집을 맡았다. 이 작업은 수학자 달랑베르를 감수자로 하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 당대 지식인들을 총동원하여 1751년에 1권을 시작으로, 1772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18세기의 철저했던 유물론자로서, 최신 생물학이나 화학을 도입한 그의 사고 속에는 이미 진화론이나 변증법이 예고되어 있었다. 레싱이나 괴테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 작품으로 철학서 『달랑베르의 꿈』 등이, 희곡 「가장」 「사생아」 등이, 소설 『수녀』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 등이, 문학 및 예술론으로 『리처드슨 예찬』 『살롱』 『회화에 대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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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은이)    정보 더보기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 근교 지아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프랑스로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간다. 1932년 파리로 돌아온 뒤라스는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소설과 연극에 탐닉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시작한다. 1943년 유년기 아시아에서의 체험과 가족애를 소재로 한 첫 소설 《타느랑 가족; 철면피들La Famille Taneran; Les Impudents》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인디아 송India song》을 비롯해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 《부영사Le Vice-Consul》 《연인L’Amant》 등 50여 년에 걸쳐 70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며, 20세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알랭 레네 감독이 연출한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영화로까지 확장한 뒤라스는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 으로 1975년 칸 영화제에서 프랑스 예술영화관협회상을 받으며 유럽 영화사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희곡 《인디아 송》은 1972년 런던 국립극장의 의뢰로 쓰였으나, 당시 공연은 실현되지 못했다. 소설·연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인디아 송》은 이듬해인 1973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뒤라스는 직접 초판의 부제를 ‘텍스트 연극 영화texte th??tre film’라고 붙였다. 1982년 발표한 희곡 《사바나 베이Savannah Bay》는 이듬해 파리의 롱푸앵 극장에서 뒤라스 자신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1995년 《이게 다예요C’est tout》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1996년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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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대학교 법학과와 파리정치대학에서 공부하지만, 1895년 문학 학사학위를 취득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 한편으로 사교계에 활발히 드나들며 당대 예술가, 작가 들과 교유를 나누면서 19세기 귀족사회와 인간관계를 유심히 관찰한다. 1896년에 소설과 단편 등을 엮은 첫 책 『쾌락과 나날』을 출간하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13년 자비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1919년 선보인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로 공쿠르상의 영예를 안는다. 이에 힘입어 이듬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는다. 이후 계속해서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집필에 몰두하여 1921년 4편 「소돔과 고모라」 첫 권까지 출간하지만, 1922년 폐렴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부모님과 같은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1927년 7편 「되찾은 시간」 출간으로 비로소 장대한 기념비적 소설이 집대성된다. 프루스트가 생전에 출간한 그 밖의 책은 비평적 산문을 모은 『모작과 잡록』(1919), 영국 비평가인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 『참깨와 백합』 번역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본성, 사랑과 예술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실험적인 문체와 철학적인 사유로 그려낸 필생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문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으로 불리며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소설로 지금도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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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소설가이자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전쟁 영웅이다. 192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공군으로 군 복무를 시작해 비행을 배웠다. 1923년 제대 후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1926년 첫 소설 『비행사』를 발표했고, 같은 해에 라테코에르에 입사해 툴루즈에서 다카르까지 우편물을 운송하는 조종사로 일했다. 그 후 모로코 남부 캅쥐비의 기지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사막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남방 우편기Courrier Sud』(1929)를 집필했다. 그 후 아에로포스타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우편항공)의 이사로 임명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1931년 파리로 돌아와 『야간 비행Vol de nuit』(1931년 페미나상 수상)을 펴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1934년에는 에어프랑스의 ‘홍보 책임자’가 되었다. 이듬해 생텍쥐페리는 파리-사이공 노선 비행 기록을 깨려고 시도했지만, 비행기가 리비아 사막에 추락했다. 나흘 동안 그곳을 방황하며 갈증에 시달리다 거의 사망할 뻔했지만 베두인족에게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1938년 뉴욕에서 티에라델푸에고까지 비행하려고 시도했지만 부상을 입고 과테말라와 뉴욕에서 오랫동안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듬해에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를 발표했고, 이 책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과 미국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2/33 비행단(1939~1940)에서 정찰 조종사로 활동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뉴욕에 정착해 1942년에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1943년에 『어느 포로에게 보낸 편지Lettre a un otage』를 펴냈다. 그의 가장 큰 성공작인 『어린 왕자Le Petit Prince』가 처음 출판된 곳도 뉴욕이었다. 이후 북아프리카로 가서 2/33 비행단에 다시 합류했다. 부상과 비행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생텍쥐페리는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1944년 7월 31일 코르시카 섬 보르고에서 비행에 나섰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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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지은이)    정보 더보기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구역의 공립 학교에서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빈곤 속에서 배웠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알제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가 작가적 양분을 공급받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1923년 프랑스 중등학교 리세에 입학했고, 이후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자퇴를 했다. 결핵 발병으로 누구보다 좋아했던 축구를 포기했다. 바칼로레아 준비반에서 철학 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고, 이후 평생 그와 교류를 이어갔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정치 활동과 연극 활동에 집중했다. 1932년 장 그르니에가 주도한 조그만 월간 문예지 [쉬드Sud]를 통해 처음으로 첫 에세이 《새로운 베를렌Un Nouveau Verlaine》을 발표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에는 진보적 신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했던 말로, 지드,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37년 첫 산문집 《안과 겉》을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알제 레퓌블리켕]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파리수아르]의 기자가 된다.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에서 검열을 피해 지방으로 옮긴 [파리수아르]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도 집필 활동에 매진한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42년 7월, 자신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이 되는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즈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프랑스 해방 운동에 참여한 카뮈는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1943), 희곡 작품 「오해」(1944)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악성,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지성계에 큰 논쟁을 촉발한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전락》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를 발표하며 문학가를 넘어 사상가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실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 무명인, 그리고 나의 ‘죽음’을 연달아 맞닥뜨리며 삶의 부조리를 고뇌하는 모습은 이후 오랫동안 수많은 독자를 실존주의의 세계로 이끈다. 와 라는 희곡을 쓰며 희곡 작가로도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 가지만, 카뮈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사고 차량에 있던 가방에서 초고 형태로 발견된 《최초의 인간》은 1994년에야 빛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여름》, 《유배지와 왕국》, 《행복한 죽음》, 《정의의 사람들ㆍ계엄령》,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젊은 시절의 글》, 《스웨덴 연설ㆍ문학 비평》, 《최초의 인간》, 《여행일기》, 《단두대에 대한 성찰ㆍ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전락·추방과 왕국》, 《안과 겉》 등의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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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님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리옹의 앙페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알레스 공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난폭한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갔다. 1859년 첫 시집 《연인들》을 출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 시인 미스트랄, 소설가 플로베르, 졸라,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교류했다. 모르니 공작의 비서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자 작품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1862년 희곡 〈마지막 우상〉을 발표했다. 1868년 알레스 공립 중학교의 경험을 담은 첫 소설 《꼬마》를 출간했고 1869년에는 단편집 《풍찻간 편지》를 출간했다. 《풍찻간 편지》에는 도데의 대표적인 단편인 〈별〉, 〈아를의 여인〉 등이 실려 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에 지원하여 비참한 전쟁을 몸소 겪었고, 1873년에 출간한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에 패전국의 비애와 애국의 정열을 담은 〈마지막 수업〉, 〈소년 간첩〉, 〈기수〉 등을 실었다. 이외에도 섬세하고 감수성 풍부한 문체로 《타라스콩의 타르타랭》, 《자크》, 《나바브》, 《뉘마 루메스탕》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1897년 12월 16일 척추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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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 (지은이)    정보 더보기
문학의 여러 가능성을 실험한 프랑스 소설가.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사전꾼들』을 발표해 현대소설에 자극을 줬다. 주요 저서로는 『좁은 문』 등이 있으며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셰익스피어, 에머슨, 니체, 루소 등 수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몽테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가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수상록』에서 교훈이 될 만한 글을 발췌하여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한 선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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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 여성 작가다. 아버지는 폴란드 왕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가문 출신이고, 어머니는 파리 세느 강변의 새장수의 딸로 가난한 서민 출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상드는 프랑스 중부의 시골 마을 노앙에 있는 할머니의 정원에서 루소를 좋아하는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8세 때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으나 순탄치 못한 생활 끝에 이혼하고,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피가로≫지에 짧은 글들을 기고하며 남장 차림의 여인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이때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남녀평등과 여성에 대한 사회 인습에 항의하여 여성의 자유로운 정열의 권리를 주장한 처녀작으로 ≪앵디아나≫(1832)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발랑틴≫(1832), 90여 편의 소설 중에서 대표작인 자서전적 애정소설 ≪렐리아≫(1833)와 ≪자크≫(1834), ≪앙드레≫(1835), ≪한 여행자의 편지≫(1834∼36), ≪시몽≫(1836), ≪모프라≫(1837), ≪위스코크≫(1838)등 연이어 나온 소설들도 호평을 받았다. 장 레이노, 미셸 드 부르주, 라므네, 피에르 르루 등과 교제하여 그 영향으로 인도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소설을 썼는데, 이 계열의 작품으로 ≪프랑스 여행의 동료≫(1841), ≪오라스≫(1841∼1842), ≪앙지보의 방앗간 주인≫(1845), ≪앙투완 씨의 죄≫(1845), 대표작이며 대하소설인 ≪콩쉬엘로≫(1842∼1843), ≪뤼돌스타드 백작 부인≫(1843∼1844), ≪스피리디옹≫(1838∼1839), ≪칠현금≫(1839), ≪테베리노≫(1845) 등이 있다. 1844년 ≪잔느≫를 필두로 해서 일련의 전원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전원소설 ≪마의 늪≫(1846), ≪소녀 파데트≫(1848∼1849), ≪사생아 프랑수아≫(1849), ≪피리부는 사람들≫(1853) 등이 있다. 노년에는 방대한 자서전인 ≪내 생애의 이야기≫(1847∼1855), 손녀들을 위한 동화 ≪할머니 이야기≫를 쓰면서 초기의 연애 모험소설로 돌아가 ≪부아도레의 미남자들≫(1857∼1858)과 ≪발메르 후작≫(1860), ≪검은 도시≫(1861), ≪타마리스≫(1862), ≪캥티니양≫(1863), ≪마지막 사랑≫(1866), ≪나농≫(1872) 등을 발표했다. 희곡과 시, 평론, 수필, 일기, 비망록, 기행문, 서문, 기사 등 180여 편에 달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특히, 그녀가 남긴 편지들은 파리의 클라식 가르니에 출판사에서 조르주 뤼뱅이 26권으로 편집 완성한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서간집으로 세계 문학사에서 서간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교환 서간집으로는 ≪상드와 플로베르≫(1904), ≪상드와 뮈세≫(1904), ≪상드와 아그리콜 페르디기에≫, ≪상드와 피에르 르루≫, ≪상드와 생트 봐브≫, ≪상드와 마리 도르발≫, ≪상드와 폴린 비아르도≫등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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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발레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의 시인·비평가·사상가. 1871년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세관직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몽펠리에 대학 재학 중에 시의 습작에 몰두하다가 파리에서 온 피에르 루이스를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앙드레 지드와 스테판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파리로 이주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 “테스트씨와의 하룻밤”, “방법의 제패” 등을 발표하면서 고도의 관념성으로 독특한 비평적인 세계를 열었다. 1917년 『젊은 파르크』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1925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면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시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최대의 산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산문작품은 다방면에 걸치는 것으로 문학 ·예술 ·철학 ·과학 등에 관한 논고論考와 현대문명에 관한 고찰이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죽을 때까지 새벽에 일어나 자신을 위하여 습관적으로 쓴 노트인 『카이에』는 1894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그가 죽은 후 29권의 사진 복제판으로 간행되었다. 3만 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꼽히며, 지금도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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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 열아홉 살에 발표한 장편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1954년 프랑스 비평가상을 받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슬픔이여 안녕』이 유럽을 넘어 전 세계 베스트셀러를 휩쓸며 프랑스 문학의 앙팡 테리블(매혹적인 작은 악마)로 불렸다. 『한 달 후, 일 년 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뒤이어 발표하는 작품들 역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운 좋은 천재 소녀의 이미지를 벗고 유럽 문단을 대표하는 한 사람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치며 신경 쇠약, 노이로제, 수면제 과용, 정신병원 입원 등으로 쇠약해져 결국 파산하는 등 힘든 말년을 보냈다. 50대에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2004년 9월 24일, 심장병과 폐혈전으로 생을 마감했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는 가장 훌륭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서간집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는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사강이 친구 베로니크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여행과 파티 속에서도 사강은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우정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사강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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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50년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城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별거 이후 에트르타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경험한 노르망디의 대자연, 시골 사람들의 성정과 습성 등은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로 자주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로서의 삶에 사표가 된 두 명의 스승, 시인 루이 부예와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난다. 1869년부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지만,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중단한다. 1871년 7월에 제대하여 1872년 3월 아버지의 소개로 해군성에 취직한다. 1880년 모파상은 에밀 졸라 등과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Les Soirees de Medan』을 출판하고, 여기 수록된 「비곗덩어리」가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과 6편의 장편, 5편의 희곡 등을 창작하며 플로베르, 졸라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10년은 육체와 정신의 병이 심각하게 나빠진 시기로, 그는 척추 통증과 시력 저하, 불면증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몇 번의 자살 기도 이후 1892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보내진 뒤 그곳에서 거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1893년 7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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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베를렌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44년 3월 30일 프랑스 로렌 주(州) 메츠에서 공병 장교인 아버지와 부농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너무도 귀하게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어린 베를렌은 버릇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명민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 되자, 보나파르트 고등학교(Lycee Bonaparte)에 진학했는데,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특히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7년 과정의 이 학교에서 베를렌은 처음 3년 동안은 분명 모범생이었지만, 4년째 접어들자 돌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시와 소설에 몰입한 문학 소년이 되었다. 1862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해서 가까스로 법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또다시 문학에만 몰두할 뿐, 정작 법률 공부는 등한시했다. 아버지의 강요로 잠시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던 베를렌은 이내 대학 공부를 집어치우고, 1864년 파리 시청의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등초본 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덕에 1865년부터 베를렌은 마음 편히 문필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으며, 1869년 친구의 이복여동생인 마틸드 모테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1년의 교제 끝에 혼인했다. 1871년 3월, 파리에 시민 혁명 정부인 코뮌이 수립되자 베를렌은 협력자로서 홍보 관련 일을 맡기도 했는데, 두 달 만에 코뮌이 진압된 후, 그 일로 인해 처벌받을까 두려웠던 그는 외가 친척들 집을 옮겨 다니며 은신하다가 결국 시청으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이 무렵, 안면부지의 열일곱 살 문학청년 랭보가 베를렌 앞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와 함께 자작시 몇 편을 보내왔다. 랭보의 시에 탄복한 베를렌은 이윽고 랭보를 불러 처가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랭보는 보름 만에 그 집에서 쫓겨나 베를렌의 친구들 집을 전전했으며, 이때부터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마틸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1873년 7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지내던 베를렌의 부름을 받고 랭보가 찾아왔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술에 취한 베를렌은 파리로 떠나겠다는 랭보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탄환 중 한 발이 랭보의 손목에 경상을 입혔고, 베를렌은 벌금형과 함께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곧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인 1874년 4월, 파리 법원은 마틸드의 청원을 받아들여 베를렌 부부의 법적 별거 선고를 내렸는데, 벨기에 몽스(Mons)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를렌은 가톨릭에 귀의해 7월에 영성체 의식을 치렀다. 1875년 1월이 되자 마침내 베를렌은 석방되었고, 그 뒤 188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오가며 교사 일을 하는 동시에 꾸준히 시를 써 나갔다. 1882년 7월, 파리 근교의 한 호텔에 거처를 정한 베를렌은 지난 10년간 소원했던 파리의 문인들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간에 완성한 그의 시들이 ≪현대적인 파리≫를 비롯한 여러 문학잡지를 통해 연이어 소개되었다. 나날이 깊어 가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편의 산문집과 시집, 희곡 작품을 발표했으며, 어느덧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2년에 들어서면서 젊은 숭배자들의 초청으로 베를렌은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돌며 시학 강연을 이어 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인을 뜻하는 ‘시인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에게서 그 칭호를 계승한 르콩트드릴이 1894년 세상을 떠나자 시인들은 새로운 ‘시인의 왕’을 뽑아야 했는데, 400명 가까운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당대의 유명 시인들 중에서 베를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인의 왕’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살아생전의 영광도 잠시뿐. 1896년 1월 8일, 폐울혈 증세를 보이던 베를렌은 급기야 52세를 일기로 그 자신이 표현했던 “저주받은 시인”다운 처량하고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이틀 뒤 수천 명의 장례 행렬이 애도하며 그의 유해를 파리 북쪽의 바티뇰(Batignolles) 묘지로 운구했으며, 그와 절친했던 여러 문인들이 애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말라르메는 베를렌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조성위원회를 발족했고, 그 결실로 마침내 1911년 파리 뤽상부르공원의 양지바른 곳에 그의 흉상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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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68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바닷가 도시 생말로에서 출생해서 콩부르 성에서 고독하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북아메리카를 여행한 뒤에 독일에 편성된 반혁명 망명 군대에 가담해서 부상당하고 병든 몸으로 영국으로 망명하여 온갖 고생을 하며 『혁명론』을 발간했음, 혁명이 끝난 후 귀국해서 영국에서 초고를 쓴 『아탈라』, 『르네』, 『그리스도교의 정수』, 『나체즈 사람들』을 마무리해서 발표했고, 그리스, 유대 지방, 이집트, 카르타고 유적지를 여행하고 『순교자들』,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기』를 썼음. 프랑스의 19세기 전기 낭만주의 문필가로서, 로마교황청, 베를린, 런던 대사와 귀족의회 의원, 외무장관을 역임한 정치가로서 다난했던 일생을 보내고, 노년에 자신의 자서전 『무덤 너머의 회상록』과 고행 수도사의 전기소설 『랑세의 생애』를 쓰고 1848년 파리에서 사망했음. 그의 유언에따라서 그가 태어난 생말로 바닷가의 암초 섬에 묻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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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10년 12월 11일 파리에서 출생한 알프레드 드 뮈세는 시, 소설, 희곡 등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낸 다재다능한 작가였다. 뮈세의 집안은 소 귀족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혁명에 동조하는 자유사상가였고, 장 자크 루소의 생애에 관한 저술도 집필한 박식한 인물이었다. 1828년 토마스 드 퀸씨의 작품을 번안한 『아편쟁이의 고백』을 출간한 뮈세는 빅토르 위고가 이끌던 문인들의 소모임인 ‘세나클’에 가입한다.. 당대의 문인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지만, 자유분방한 뮈세는 이 유파의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1833년 스물세 살인 뮈세는 당시 스물아홉 살이던 조르주 상드와 만나 열애에 빠진다. 이 둘은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나지만 병에 걸린 뮈세를 간호하던 상드는 의사 파젤로와 눈이 맞아 뮈세를 배신한다. 상드와의 격정적이었으나 고통스럽게 끝난 사랑은 자전적 소설인 『세기아의 고백』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1837년까지 뮈세가 격정적인 사랑을 했던 시기는 그가 가장 왕성하게 문학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와 겹친다. 1830년 7월 혁명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은 당시 젊은 세대들이 겪고 있던 이른바 ‘세기병’의 한 원인이 되었고, 이것이 뮈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특유의 비관적 세계관을 설명해 준다. 세련된 유행의 첨단에 섰던 댄디의 전형인 뮈세는, 1839년 이후, 즉 그의 젊은 시기가 지나간 이후에는 문학적 영감을 잃게 된다. 1852년 뮈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미 보들레르를 위시한 새로운 세대는 뮈세를 과도한 주관적 정서의 과잉을 보여주던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폄하하게 된다. 병들고 친구들에게도 잊힌 존재가 된 뮈세는 1857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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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3년 프랑스인 아버지 미셸 드 크레양쿠르와 벨기에인 어머니 페르낭드 드 카르티에 사이에서 출생한다. 브뤼셀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산욕열로 열흘 후에 사망하자 본가가 있는 프랑스 북부 릴 근처의 몽누아르 성에서 성장한다. 프랑스 노르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였던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평생토록 반항, 모험, 여행, 사랑을 즐겼던 그 시대의 자유인이었다. 1980년 유르스나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상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된다. 1635년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가 프랑스어와 인문학을 진흥할 목적으로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40석의 종신회원으로 구성되는데, 345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성 회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르스나르의 아카데미 입회는 페미니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영광의 시기를 함께한 사람은 제리 윌슨(Jerry Wilson)이었다. 1979년에 사망한 그레이스 프릭의 빈자리를 대신해, 미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사진 작가 제리 윌슨은 전 세계를 함께 여행했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서 유르스나르의 마지막 삶의 증인이 된다. 이 시기 작가는 전 재산을 그에게 상속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지만, 1986년 에이즈로 그가 먼저 사망하자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해 전 재산을 환경보호 단체에 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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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데스노스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초등교육만 이수하였으며,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였다. 1922년부터는 앙드레 브르통이 주도하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최면상태에서 자동기술법을 실천했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1929년에는 점차 정치색이 짙어지는 브르통과 결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거나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점령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1944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어느 수용소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첫 시집으로 마르셀 뒤샹이 창조한 가상의 여인에 대한 시 『로즈 셀라비』를 비롯하여 『애도를 위한 애도』, 『알 수 없는 여인에게』, 『어둠들』, 『자유냐 사랑이냐!』, 『행운』 등 많은 시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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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3년 부르고뉴 생소뵈르앙퓌제에서 마르티니크 혈통의 어머니 시도니 랑두아와 세관이었던 아버지 쥘조세프 콜레트의 차녀로 태어났다. 콜레트는 1893년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로 유명했던 열네 살 연상의 앙리 고티에빌라르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이후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한 남편에 의해 남편의 필명인 ‘윌리’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클로딘〉 연작에 속하는 여러 소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앙리가 콜레트의 허락 없이 소설의 판권을 매각한 것이 원인이 되어 1905년부터 콜레트는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10년 법적으로 앙리와 이혼한 콜레트는 경험을 바탕으로 『방랑하는 여인』을 발표하고 외교관인 필리프 베르톨트의 후원을 받아 폴 클로델, 장 지로두 등과 교유하였으며,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앙리 드 주브넬의 도움으로 「르 마탱」 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실었다. 1913년 그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인 콜레트 르네 드 주브넬을 얻었고, 남편의 외도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셰리』를 1920년에 발표하여 큰 성공을 얻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서훈받았다. 1923년 앙리 드 주브넬과 이혼한 콜레트는 『청맥』과 『셰리의 최후』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사업가였던 모리스 구드케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독일 제3제국의 파리 점령기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 두 달만에 풀려나는 고초를 겪었다. 전시의 생계 문제와 지병인 관절염에 고생하던 콜레트는 「지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집필하고 여러 신문에 글을 싣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비정치주의를 지향하던 그의 글이 진영을 막론하고 다양한 지면에 수록된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1945년 아카데미 공쿠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3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 도피시에 훈장을 서훈받았다. 1954년 숨을 거두었으며, 장례식은 프랑스 가톨릭이 그의 장례미사 집전을 거부함에 따라 여성으로서는 프랑스 공화국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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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브루제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 소설가. 시인으로 데뷔하여 소설을 썼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주로 썼으며, 구성미와 심리 분석에 탁월한 작가로 알려졌다. 작품에 보수주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대표작으로 《이혼》, 《대낮의 악마》, 《죽음의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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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작가이자 번역가. 파리 8대학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소프루》,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베티 본의 《프루스트의 마들렌》,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세월》 《사진의 용도》 《진정한 장소》 등이, 엮고 옮긴 책으로 《생텍쥐페리의 문장들》 등이 있다. 희곡집 《누아》,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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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커다랗고 찬란한 고요 속에 그 작은 정원을 가꾸는 일은 새 한 마리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은 아무것도 음침하지 않았다. 다만 바다가 더 커다랗게, 하늘이 더 높게 보였으며, 생명의 힘으로 우리를 뒤흔들고 짓누르는 자연 속에서 이 깨지 않는 잠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영원한 휴식의 느낌을 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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