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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단편 소설 12선

세계단편 소설 12선

(세계단편 소설 모음)

오 헨리, 니콜라이 고골, 너대니얼 호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 빅토르 위고,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알퐁스 도데, 에드거 앨런 포우, 어니스트 헤밍웨이, 기 드 모파상,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은이)
  |  
북앤북
2013-10-25
  |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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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단편 소설 12선

책 정보

· 제목 : 세계단편 소설 12선 (세계단편 소설 모음)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88989994930
· 쪽수 : 336쪽

책 소개

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세계단편 소설 12선. 교과서에 수록된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문학 작품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작품 전문을 작자 소개와 줄거리 및 해설을 예쁜 삽화와 함께 실었다.

목차

모파상 : 목걸이
톨스토이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 헨리 : 마지막 잎새
호손 : 큰 바위 얼굴
빅토르위고 : 가난한 사람들
헤밍웨이 : 살인자
고골리 : 외투
체호프 : 귀여운 여인
고리끼 : 2인조도둑
투르게네프 : 밀회
도데 : 별
포우 : 검은고양이

저자소개

오 헨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단편소설 작가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 알게몬 시드니 포터와 어머니 메리 제인 버지니아 와인 포터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잃어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텍사스로, 1884년에는 오스틴으로 이주하면서 목장 관리, 제도사, 기자,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였다. 1887년 아솔 에스테스와 결혼했으며, 1891년 오스틴은행에 근무하면서 아내의 내조를 얻어 주간지를 창간했으며, 지방신문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기고하는 등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은행 공금횡령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피했으나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체포되었다. 1898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교도소의 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고, 즉각 잡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며, 출감하면서 이름을 오 헨리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뉴욕의 《월드(World)》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였다. 최초의 소설집 《캐비지와 왕(Cabbages and Kings)》(1904)을 시작으로, 《400만(The Four Million)》(1906), 《손질 잘한 램프(The Trimmed Lamp)》(1907), 《서부의 마음(Heart of the West)》(1907) 등의 단편집을 계속해서 출간했다. 헨리의 말년은 악화된 건강, 금전상 압박과의 싸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졌다. 1907년에 한 재혼은 불행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와 간경화, 당뇨병 등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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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체호프, 푸시킨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소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친러시아적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정교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다. 10대에 러시아 낭만주의 문화를 접하기도 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해 하급 관리로 생활하면서 낭만주의적인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를 발표한다. 이 설화집은 푸시킨, 주콥스키 등 당시 최고 문인들과 벨린스키 같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고골은 이내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는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을 수행하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 교사와 역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키예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에 지원하는데,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작가로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1835년 초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 『미르고로드(Mirgorod)』와 문화-역사 비평 에세이들로 구성된 『아라베스크(Arabesques)』를 출간하고, 1836년에는 희곡 「감찰관(Revizor)」과 단편 소설 「코(Nos)」를 발표하면서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독자와 관객들이 「감찰관」을 사회 풍자 혹은 가벼운 소극(笑劇)으로만 인식하고, 일부 관객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하는 데 상처를 받고 1836년 말 유럽으로 떠나 1848년까지 로마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842년에 장편 소설인 『죽은 혼』 1부를 발표했으며 이후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에 정착하여 종교적인 정진에 힘쓰면서 2부에 전념하여 1851년 완성본을 탈고한다. 고골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정교 수도사에게 『죽은 혼』 2부의 평을 부탁했으나 부분적으로 미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낙담해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고골은 정교의 대정진 기간에 금식을 극단적으로 수행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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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04년 7월 4일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의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집안의 성이 호손(Hawthorne)이 아니라 헤이손(Hathorne)이었는데, 1659년 조상인 윌리엄 헤이손이 퀘이커 여신도들을 학대한 것을 수치로 여겨 호손 본인이 ‘w’자를 삽입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학업에서는 탁월하지 못했으나 벌써 영국의 위대한 문학에 비길 만한 미국 문화 창조라는 야망에 불타서 열심히 집필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2년간 호손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광범위한 독서와 습작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청교도적인 배경과 그 정신적 기질을 탐구해 자신 속에 배어 있는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 정신을 키웠다. 그의 데뷔작은 ≪팬쇼≫란 소설인데, 1828년 익명으로 자비 출판했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모두 수거해 파기해 버렸다. 이후 한동안 단편에만 손을 대 초창기에는 주로 익명이나 가명으로 신문, 잡지 등에 기고했다. 1837년에 12년간의 은둔 생활 동안 쓴 단편들을 모은 우화적 단편소설집 ≪두 번 하는 이야기들≫을 친구인 호레이쇼 브리지의 주선으로 출간했다. 이 단편집이 롱펠로가 천재라고 극찬한 논평을 위시해 문학계의 호평을 받게 되어 바깥 세상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알렸다. 1850년에는 그의 유명한 ≪주홍 글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호손에게 문학적·재정적 성공을 안겨 주었다. 이어서 1851년 ≪일곱 박공의 집≫을 출간했고, 이듬해에는 ≪블라이드데일 로맨스≫와 ≪눈사람과 다른 두 번 하는 이야기들≫을 선보였다. 1860년에 ≪대리석 목양신≫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이탈리아라는 이국을 배경으로 죄를 통해 지성과 양심의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성숙해 가는 한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1857년 호손은 유럽 각지를 여행한 후 1860년에 귀국했다. 이후 1864년까지 웨이사이드에서 집필을 계속하면서 영국의 풍경, 생활 풍습 등을 스케치풍으로 그린 작품들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점차 창작력과 건강이 쇠퇴해, 1864년 뉴햄프셔를 여행하던 중 5월 19일 플리머스에서 60세를 일기로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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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28년 9월 9일 러시아 툴라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 손에 자란 톨스토이는 16세에 카잔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형식적인 교육에 실망해 그만두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오가며 방황하던 톨스토이는 1851년 형 니콜라이를 따라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복무하면서 〈어린 시절〉 등 자전적 삼부작을 발표해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850년대 후반에는 농민들의 열악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교육에 있다고 판단, 야스나야 폴랴나 농민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교육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병행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평론을 썼으며,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자기완성과 악에 대한 무저항, 사적 소유 부정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기초하여 《고백》 《인생에 대하여》 《예술론》 등을 저술하고 당대 러시아 사회와 종교를 강렬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압박을 받았지만, 모든 걸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러시아 황제와 달리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러시아 황제로 불릴 만큼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만년에 이르러 술·담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농부처럼 입고 노동하며 생활했다. 생전에 수많은 톨스토이주의자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몰려와 농민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조용한 피난처를 찾아 집을 나선 며칠 후, 1910년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가출은 현실에 대한 극복이자 다른 삶을 향한 마지막 도전으로 상징된다. 작가이자 폭력을 거부한 평화사상가, 농민교육가이자 삶의 철학자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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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고리키는 여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다. 1877년 1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열 살이 되던 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1881년 ‘선’이라는 배에서 접시닦이를 하던 그는 글을 모르는 주방장 스무리에게 책을 읽어 주며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고골, 네크라소프, 뒤마, 발자크,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접한다.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접한다. 힘든 노동과 미래에 대한 절망을 느낀 그는 1887년 19살이 되던 해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만성적인 폐결핵을 앓게 된다.그 후 고리키는 코롤렌코의 서기로 일하는데, 이때 자연과학, 니체 이론 등을 공부하고, 1891년 러시아를 여행하던 중 칼류즈니를 만나 그의 권고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1892년 9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이후, 여러 단편들을 잇달아 발표한 고리키는 신문에 평론이나 칼럼을 쓰며 정치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1898년 단편 20편과 수필을 모은 책 ≪수필 및 단편집≫을 출간해 문학적 명성을 얻었으나, 지속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가열되는 학생 데모와 파업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들을 탄압하는 정부를 비판해 세 번째로 수감된다. 톨스토이가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고리키는 감옥에서 <바다제비의 노래>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혁명의 노래처럼 불리게 된다. 1902년 ≪소시민≫과 ≪밑바닥에서≫가 초연되고, 1904년 ≪별장족들≫을 저술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05년 1차 혁명을 목격하고 차르 정부를 비난한다. 이로 인해 결국 유형을 당한다. 1906년 차르 정부의 러시아 차관을 차단하는 활동한 죄로 러시아로의 귀국이 허용되지 않자 1913년까지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정착한다. 1913년 로모소노프 가문 300주년 기념 특사로 사면을 받은 고리키는 페테르부르크로 가 문학·정치 활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기를 권유받아, 1913년 영구 귀국 할 때까지 이탈리아의 소렌토에 살았다.다난하고도 복잡한 삶을 살아 온 막심 고리키는 1936년 6월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68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이틀 후 스탈린 등의 국가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그의 장례가 치러졌다. 시신은 크레믈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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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원작)    정보 더보기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인 아버지와 왕당파 집안 출신인 어머니의 셋째아들로, 당시 아버지의 임지였던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이후 파리, 나폴리, 마드리드 등을 전전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 독서와 시 창작, 문예 비평에 열중하다 스무 살이 되던 1822년 첫 시집《송가와 여러 시》를 발표했다. 1823년 첫 장편소설《아이슬란드의 한Han》에 이어 1827년 운문 희곡〈크롬웰〉등을 발표하여 낭만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했고 1830년 초연된 희곡〈에르나니〉로 고전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획득했다. 1831년 발표한 역사소설《파리의 노트르담》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 시기에 정치성을 띤 시집을 다수 발간했다. 현실 참여적인 지식인이자 인도주의자로서 사형제 폐지와 빈민 구제를 주장한 위고는 공화파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제정을 수립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 국외로 추방되어 브뤼셀 등지에서 19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작품 집필에 몰두하여《명상시집》과《레 미제라블》을 비롯한 걸작들을 남겼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면서 파리에 돌아온 후 1876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지만 1878년 뇌출혈로 건강이 악화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1885년 파리에서 폐울혈로 사망한 그의 장례는 국민적인 애도 속에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시신은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대하소설《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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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우크라이나 아조우해의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종교적인 가풍 속에 성장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아름다운 엘렌>을 관람하고 문학과 연극에 빠져들었다. 1876년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가운데 홀로 타간로그에 남아 1879년 타간로그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같은 해 모스크바 의대에 진학했으며, 이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풍자와 유머가 담긴 이야기들을 잡지에 기고하며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환자 없는 의사’, ‘삼촌’, ‘내 형제의 형제’ 등 수십 개의 필명을 사용한 바 있다. 1887년 작품집 <황혼>이 푸쉬킨 상을 받으며 러시아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1888년 중편소설 <대초원>으로 이전과는 차별화된 작품 세계를 열었다. 1890년 죄수 수용소가 있는 사할린섬을 방문하여 거의 1년간 체류한 경험이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잘 알려진 단편들인 <6호실>(1892), <대학생>(1894), <다락이 있는 집>(1896), <나의 삶>(1896), 희곡 <갈매기>(1896), <바냐 삼촌>(1896) 등이 그 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1898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건강이 나빠지자 1899년 크림반도의 얄타로 이주했다. 이 시기에 쓴 작품 중 대표적인 단편들로는 <귀여운 여인>(1899),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이 있고 희곡은 <세 자매>(1900), <벚꽃 동산>(1903)이 있다. 1904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냥이 끝나고>는 1884년 8월부터 1885년 5월까지 신문 <노보스티 드냐>에 실렸던 연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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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남프랑스 님에서 출생.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업이 파산하여 중퇴하고, 알레스에 있는 중학교 사환으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857년 형이 있는 파리에 가서 문학에 전념하며 시집인 《사랑에 빠진 연인들 Les Amoureuses》을 발표, 이것이 당시의 입법의회 의장 모르니 공작에게 인정받아 비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학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 그 후에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친교를 맺은 문인들과 더불어 자연주의의 일파에 속했으나 선천적으로 민감한 감수성, 섬세한 시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적인 면이 넘치는 유연한 문체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고향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주제로 하여 인상주의적인 자신만의 작풍을 세웠다. 그의 문장은 보여 줄 것이 많은 예술가의 문장이자 시니컬하면서도 동정심을 담은 시인의 문장이다. 익살스런 농담에서부터 더없이 섬세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재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학자들부터 군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매혹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경험담으로 작품에 활기를 부여할 줄 알았던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빛바래지 않은 다양한 작품으로 ‘아름다운 문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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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09년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버지니아의 부유한 상인 존 앨런에게 입양되었다.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해 고대어와 현대어를 공부했지만 도박에 빠져 빚을 지면서 양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명으로 시집 《테멀레인 외 다른 시들》(1827)을 출간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두 번째 시집 《알 아라프, 테멀레인 외 다른 시들》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계속되는 양부와의 불화로 파양당하고, 학교에서도 일부러 퇴학당했다. 그 후 단편 집필을 시작, 1832년 필라델피아 신문에 처음으로 다섯 편의 단편이 실리고, 이듬해 단편 〈병 속의 수기〉가 볼티모어 주간지 소설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양부 존 앨런이 유산을 전혀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잡지사 편집자로 취직했고, 이 무렵 사촌여동생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음주 문제로 잡지사를 그만두고, 장편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 이야기》(1838)와 단편집 《기괴하고 기이한 이야기들》(1839)을 발표했다. 새로운 잡지사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곧 해고당하고 아내 버지니아도 폐결핵에 걸리자 절망으로 폭음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모르그 가의 살인〉, 〈검은 고양이〉, 〈황금 벌레〉 등 다수의 유명 단편들을 집중적으로 발표했고, 1845년 시 〈까마귀〉로 화제가 되면서 같은 해 시 창작에 관한 에세이 〈작법의 철학〉을 발표했다. 소설과 시뿐 아니라 비평 활동도 활발히 했으며, 신랄한 비판으로 문단과 마찰이 심했다. 1847년 버지니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으로 더욱 피폐해졌다. 1849년 10월 볼티모어 거리에서 인사불성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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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를 두었고,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평생을 낚시와 사냥, 투우 등에 집착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맹렬한 행동을 추구하고, 행동의 세계를 통해 자아의 확대를 성취하려 했다. 그러한 인생관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주간지 편집을 맡아 직접 기사와 단편을 썼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7년 [캔자스시티 스타]의 수습기자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휴전 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 각지를 돌며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1921년, 해외 특파원으로 건너간 파리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 유명 작가들과 교유하는 등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23년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詩)』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시대에』, 『봄의 분류(奔流)』,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발표했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소설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후 192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피츠제럴드’와 ‘포그너’와 함께 3대 작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첫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1926년에 발표했는데, 헤밍웨이의 대다수 작품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되었다. 전쟁 중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전쟁문학의 걸작 『무기여 잘 있거라』(1929)는 그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 데 공헌했으며,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는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 10년 만에 소설 한 편을 발표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2년 인간의 희망과 불굴의 정신을 풀어낸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큰 찬사를 받았으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 해에 두 번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는데, 말년에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막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동의 규범에 철저한 만큼이나 죽음과 대결하는 삶의 성실성과 숭고함을 작품에 투영하려 노력해왔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 주로 거처를 옮겼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1961년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으로는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52년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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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50년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城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별거 이후 에트르타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경험한 노르망디의 대자연, 시골 사람들의 성정과 습성 등은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로 자주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로서의 삶에 사표가 된 두 명의 스승, 시인 루이 부예와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난다. 1869년부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지만,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중단한다. 1871년 7월에 제대하여 1872년 3월 아버지의 소개로 해군성에 취직한다. 1880년 모파상은 에밀 졸라 등과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Les Soirees de Medan』을 출판하고, 여기 수록된 「비곗덩어리」가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과 6편의 장편, 5편의 희곡 등을 창작하며 플로베르, 졸라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10년은 육체와 정신의 병이 심각하게 나빠진 시기로, 그는 척추 통증과 시력 저하, 불면증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몇 번의 자살 기도 이후 1892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보내진 뒤 그곳에서 거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1893년 7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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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18년 러시아 중부 오룔의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1833년 모스크바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했고, 페테르부르크대학교 철학부로 옮겨 1836년 졸업했다. 1838년부터 독일 베를린대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스탄케비치, 바쿠닌 등 러시아 이상주의자, 서구주의자와 교유했다. 1841년 귀국한 뒤 진보적 청년 모임에 참가하며 집필을 시작했다. 1843년부터 1845년까지 러시아 내무성에 근무하며 희곡과 중편 등을 썼고, 서사시 『파라샤』(1843)가 벨린스키에게 호평받았다. 1847년 〈동시대인〉에 「호리와 칼리니치」를 발표하고 작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 단편을 비롯해 수년간 꾸준히 발표한 총 스물다섯 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자, 대자연을 배경으로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농노제 아래 민중의 삶을 뛰어난 서정으로 담아낸 『사냥꾼의 수기』(1852)가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850년 모친이 사망했을 때는 집안 소유 농노 천여 명을 해방하려 해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후 주로 파리에서 지내며 자료 조사와 집필을 위해 귀국할 때를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루딘』(1856), 『귀족의 둥지』(1858), 『전야』(18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187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 사회혁명을 그린 마지막 작품 『미개척지』(1877)까지 총 여섯 편의 장편을 남겼다. 러시아 최고의 미문가,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 인도주의 작가로 당대 지식인의 양심을 대표하며 말년까지 명상과 사색을 이어가다 1883년 파리 교외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페테르부르크 볼콥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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