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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91188765041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7-12-31
책 소개
목차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그리고 수원┃이이화
정조의 인간존중이 투영된 동학의 평등정신┃김준혁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편과 3·1운동┃임형진
1894년 경기도 지역의 변란 상황과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신영우
‘광무양안’으로 본 수원 지역 농민들의 사회경제 기반┃왕현종
수원 지역 동학·천도교 유적지와 3·1운동 탐방로┃이동근
수원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채길순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과 인문도시로서의 수원┃조극훈
저자소개
책속에서
3·1운동 당시에 수원의 군세는 어떠했을까? 조선 말기인 1896년에 수원유수부를 수원군으로 강등시켜 경기도에 소속시켰다. 이는 두 번째로 군세가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4년 전국 행정개편을 단행하면서 양주군을 수원군에 통합시키고 광주군 안산군의 일부 지역을 수원군에 편입시켜 확대 개편하였다. 하지만 경기도청과 경기도경찰부는 여전히 경성부에 두었다. 그리하여 수원군은 3·1운동 당시 도시보다 농촌 지역의 범위가 넓었다. 당시에 제암리는 수원군에 들었다. 수원에서는 학생들보다 농민들이 만세시위의 주동이 되었다. 먼저 장안면의 사정을 보면, 4월 3일 조암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나서 장안면장에게 달려가 만세 부르기를 강박하였다. 이에 경찰이 발포해 1명이 사망하자, 시위대가 경찰주재소를 방화해 경찰 1명이 사망하였다. 뒤이어 헌병대가 출동해 주민들의 주택에 방화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그리고 수원‘ 중에서>
제암리 학살사건은 철저한 탄압으로 하마터면 묻힐 뻔 했으나,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스코필드와 노블 등 외국인 선교사와 커티스 미 영사의 노력으로 사건 진상이 외부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은 국제사회에서 일본 측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큰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선교사들 가운데 언더우드, 스코필드 등은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하여 사실 파악과 부상자 치료와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했으며, 영국의 대리영사와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내 세계 여론과 세계 교회에 그 진상을 알리는 데 노력했다.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편과 3·1운동‘ 중에서>
수원 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수원면 화홍문 방화수류정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유학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 학생, 상인과 기생까지 수원군의 전 계층이 참여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수원군의 3·1운동은 산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으나, 송산면·우정면·장안면 등의 시위는 사전 계획에 조직적으로 격렬한 투쟁 양상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갖은 악행을 일삼던 순사들도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천도교인들이 선봉에 서서 이 지역 3·1운동을 이끌어 갔다. <‘수원 지역 동학·천도교 유적지와 3·1운동 탐방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