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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풍천리

춘풍천리

나도향, 박태원, 박화성, 심훈, 양주동, 이광수, 이태준, 김진섭, 이은상, 이선희, 안재홍, 정인섭, 김자혜, 이원조 (지은이), 이민희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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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풍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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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춘풍천리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4066942
· 쪽수 : 217쪽
· 출판일 : 2011-03-31

책 소개

1938년에 당대 최고의 수필을 모아 국내 최초로 수필 선집 형태로 간행한 <현대조선문학 전집-수필 기행집>에 수록된 41편의 글 중 27편을 이민희가 번역, 주해하였다. 원본에는 총 열여섯 명의 작가에 총 4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열네 명의 작가가 쓴 총 27편의 작품을 선별, 수록했다. 제외된 작가는 김동인과 노자영이다.

목차

삶의 정경

우산 | 박태원
첫여름 풍경 | 박태원
병원 | 박태원
적권세심기 | 심훈
낙서 | 이태준
노변잡기 | 양주동
다락루 야화 | 양주동

기억의 표정

회향 |이원조
기설문 | 이은상
낙엽일기 | 이원
그 은행나무 | 박화성
주찬 | 김진섭

시대를 보는 눈

봄은 어느 곳에 |심훈
조선의 영웅 | 심훈
여인의 도성 | 이선희
고달픈 여인들 | 김자혜
그 늙은 인력거꾼 | 김자혜

지나는 길에서

금강산 비로봉 등척기 | 이광수
춘풍천리 | 안재홍
애급의 여행 | 정인섭
산성의 정오 | 박화성

깨닫는 소리

참회 | 이광수
사랑 | 이광수
창 |김진섭
그믐달 | 나도향
낙엽은 패잔병 | 김자혜
무수석불 |이은상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역주자에 대해

저자소개

나도향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2년 서울 출생. 본명 경손(慶孫), 호 도향(稻香), 필명 빈(彬)을 사용했다.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경성의전(京城醫專)에 다니다가 도일한 후 학비가 없어 귀국하였다. 1921년 단편 「추억」을 「시민공론」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후 홍사용, 박종화 등과 문예 동인지 「백조」를 창간하고 『젊은이의 시절』등 애상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3년에 『17원 50전』 『행랑 자식』을 『개벽(開闢)』에, 『여이발사(女理髮師)』를 『백조』에 발표하였고, 1925년에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함으로써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촛점을 맞춘 작품을 주로 선보이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애상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은 물론 주관적인 애상과 감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는 작품까지, 폭넓은 작가세계를 보여주는 완숙한 경지의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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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0년 1월 17일(음력 1909년 12월 7일) 서울 수중박골(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점성(點星)이었는데, 등의 한쪽에 커다란 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필명으로 몽보(夢甫), 구보(丘甫) 등을 썼다. 192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 ≪동명≫ 33호에 작문 <달맞이>가 실린다. 18세에는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실린다. 이듬해는 경성제일고보를 휴학하고 춘원 이광수에게 개인적으로 문학 지도를 받았다. 1929년에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한 뒤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1933년에는 ‘구인회’에 가입해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해방정국 때 ‘조선문학가동맹’의 요직을 맡았으나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해 전향 성명서에 서명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가족을 남겨 두고 월북했다. 당뇨병으로 실명하고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을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중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을 비롯해 소설집 ≪천변풍경≫(1938), 월북 후 북한에서 집필한 대하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갑오 농민 전쟁≫ 등이 있다. 남한에 남겨진 가족 중 맏딸은 1951년 월북했으며, 남은 가족 중 차녀의 막내아들이 영화감독 봉준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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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성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3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15년 목포 정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에 입학, 수료했다. 1925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1932년 중편 「하수도 공사」를 《동광》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집필해온 『백화』는 1932년 6월부터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며, 여성 작가 최초의 장편소설로 기록된다. 그 밖에도 『북국의 여명』 『고개를 넘으면』 『사랑』 등 장편 17편과 「비탈」 「홍수전후」 「한귀」 「고향 없는 사람들」 「호박」 「휴화산」 등 중단편 60여 편을 비롯해 희곡, 동화, 수필, 평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예술원문학상, 한국문학상, 목포시문화상, 은관문화훈장, 삼일문화상 등을 받았다. 1985년 단편 「마지막 편지」 「달리는 아침에」를 발표하고, 1988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후 박화성문학기념관이 개관되고, 『박화성문학전집』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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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리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어렸을 때 ‘삼준(三俊)’, ‘삼보(三保)’로도 불렸으며, 필명으로 ‘금강샘’, ‘백랑생(白浪生)’, ‘해풍(海風)’ 등을 썼고, 1926년 이후부터 아호로 ‘훈(熏)’을 썼다.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2년 뒤인 1917년 3월에는 왕족의 누이동생 이해영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일본인 수학 선생에게 항의하며, 그 항의의 표시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수학 과목이 낙제되어 유급을 당한다. 1919년 3월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심훈은 남대문 앞에서 가담하며, 3월 5일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7월 형 집행을 마치고 풀려나지만 퇴학을 당한다. 심훈은 당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1920년 심훈은 흑석동 본가와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독서에 매진하며,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1921년 그는 중국 항저우의 즈장대학(之江大學) 문학원에 입학해 극문학 관련 공부를 하다가 1923년 국내에 들어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등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송영, 이적효, 이호, 박세영, 김홍파 등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문화 단체인 ‘염군사’ 멤버로 동참하며, 1925년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도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무산 계급의 해방 문학보다는 전방위적인 해방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2월 심훈은 동아일보 학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후 ‘철필구락부’에 가입하며, ‘철필구락부 사건(급료 인상 투쟁 사건)’으로 해직된다. 그해 11월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부터 “심훈(沈熏)”이란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1927년 2월에는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일(渡日)하며 일본의 닛카스(日活) 회사에 입사하지만 얼마 있지 않고 5월 귀국해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한다. 그러나 일본 황태자를 전하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 되어 퇴사를 당한다. 그리고 7월에는 나운규를 감독으로 <탈춤>을 영화화하며, 10월에는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원제 <어둠에서 어둠까지>)를 완성해 상영하기도 한다. 1928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신문 기자직을 이어 가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생계를 외상으로 허덕인다. 이 해 11월 ≪새벗≫에 소년 영화 소설 <기남(奇男)의 모험(冒險)>을 게재한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오월비상(五月飛霜)>을 게재하며, <원단잡음(元旦雜吟)>, <거리의 봄>, <어린이날>, <야구(野球)> 등의 시도 여러 편 게재한다. 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나 10월 29일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정옥(安貞玉)과 약혼하며, 12월 24일에는 결혼을 한다. 1931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에 <불사조>를 연재하나 12월에 또다시 검열로 중단된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양친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살게 되며, 그해 4월 아들 ‘재건’이 태어난다. 이해 9월 경성세광사에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이 미뤄진다. 1933년 7월 심훈은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영원한 미소≫를 연재하며, 8월에는 기자 생활을 못 잊어 서울로 상경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당진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는 1934년 3월 이혼한 부인 이(李)씨를 모델로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여기서 생긴 원고료로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그 집에서 ≪상록수≫를 완성한다. 1935년 2월 심훈의 장편소설 ≪영원한 미소≫가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며, 8월에는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공모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심훈은 그때 받은 상금 500원 중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며, 이 후원으로 상록학원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1936년 8월 10일 심훈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접하고는 신문 호외의 뒷면에 시 <절필-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를 써서 ≪중앙≫ 문예지 편집실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상록수≫ 출판 문제를 의논하고 ≪심훈 시가집≫ 교정을 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17일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949년 7월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그의 시가집이 중형(仲兄) 심설송(沈雪松)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으로 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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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 (지은이)    정보 더보기
국문학자, 시인, 비평가. 1903년 경기도 개성 출생, 황해도 장연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어린 시절에는 부모로부터 한학을 익혔다. 1920년, 당대의 신학문을 학습코자 서울로 유학, 수학, 영어 등과 같은 분야의 학습에 열중하였으며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일본인 오구라 신페이가 『향가 및 이두의 연구』라는 책을 발표해 『삼국유사』, 『균여전』을 통해 전하는 25수 향가의 해독을 시도한 것에 자극 받아 1937년,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해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해독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1942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독한 『조선고가연구』를 출간하였다. 광복 후에도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한 『여요전주』(1947)를 비롯, 『조선고가연구』의 개정증보판인 『고가연구』를 발간하며 활발한 학술 활동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산문가로서의 역량도 발휘하였는데 대표적인 산문집으로 『문주반생기』, 『인생잡기』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1947년부터는 중간에 연세대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기간(1958-1961)을 제외하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교에 헌신하다가 1977년, 타계하였다. 1995-1998년, 제자들이 그의 모든 저술을 집성하여 『양주동전집』(전12권, 동국대학교출판부)을 간행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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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매우 중요한 작가이면서,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그는 『무정』, 『재생』, 『흙』, 『유정』,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본격 장편소설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소설의 ‘제1형식’을 창출하였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조선문단』, 『동광』 등의 한글 잡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필 활동을 펼침으로써 현대 ‘한국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단종애사』, 『이순신』, 『세조대왕』, 『원효대사』, 『사랑의 동명왕』 등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는 시대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화함으로써 민족적 위기의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기억을 소설의 장에 옮겨 민족적 ‘자아’를 보존하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성립을 증명한 『무정』의 작가요, 도산 안창호의 유정 세계의 꿈을 이어받은 사상가요,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한 민족운동가요, 민족적 ‘저항’과 ‘대일협력’의 간극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처절한 생애를 살아간, 험난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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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제강점기 「오몽녀」, 「아무일도 없소」, 「돌다리」 등을 저술한 소설가 아버지 이문교는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는데, 당시 한말의 개혁파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듯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망명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려서부터 어렵게 수학하였다.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李秉岐)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다. 그런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 개벽사(開闢社) 기자로 일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李孝石)·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유치진(柳致眞)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농군(農軍)」(文章, 1939.7.)·「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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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지은이)    정보 더보기
청천(聽川) 김진섭(金晋燮)은 1903년 8월 목포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안동이었으나 관리였던 부친을 따라 제주와 나주 등지로 옮겨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20년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같은 대학 예과로 전과했으며 1924년에 독문학과에 입학해 1927년에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 손우성, 이하윤, 정인섭 등과 외국 문학 연구회를 결성하였고, ≪해외 문학≫ 발행에 참여했다. 귀국 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수필과 평론을 발표했으며, 극예술 연구회를 통해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에서 독문학을 강의했으며, 서울신문사 출판국장을 지냈다. 1950년 8월 자택에서 납북되었고 이후 생사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진섭은 1920년대 중반부터 200여 편의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으며, ≪인생 예찬≫(1948), ≪생활인의 철학≫(1949), ≪교양의 문학≫(1950) 등을 발행했다. 1958년 박종화의 주관으로 40여 편의 유고를 모아 ≪청천 김진섭 수필집≫(신아사)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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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이다. 호는 노산(蘆山)으로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현대 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 ‘봄처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호남신문사 사장, 대구 청구대 교수,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한민족문화협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영남대 교수 등을 지냈다. 언론, 학술, 사학 방면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1960년대 한학자들과 함께 <이충무공전서> 국역 작업에 참여했다. 전서본과 친필 초본을 합쳐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 펴낸 <난중일기>는 이후 나온 모든 국역본들의 바탕이 되었다. 역주해본 <난중일기>와 함께 저서로 <노산 시조집>, <조국 강산> 등 시조집과 <이충무공 일대기>, <조선 사화집>, <민족의 맥박>, <노변필담>, <피어린 육백 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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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성장기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냈다. 십 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잡지 《개벽》 《신여성》 《신세기》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조선일보》 학예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4년 《개벽》사에서 기자로 1년간 근무하면서 쓴 단편 「불야여인-가등」을 《중앙》 12월호에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36년 《신가정》 6월호에 「오후 11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단편 「계산서」, 중편 「처의 설계」, 장편 「여인 명령」 등 열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콩트, 사십여 편의 수필과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해방 이후 1946년 극작가인 남편 박영호를 따라 월북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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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립운동가, 국학자, 민족사학자, 언론인, 정치인.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였고, 1907년 서울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상해, 북경 등 중국을 여행하였고, 신규식 선생 주도하의 독립혁명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1914년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7년 민족종교이자 당시 독립지사들의 구심점이었던 나철 선생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入敎)하였으며, 1919년 11월 비밀항일결사인 청년외교단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후 1943년까지 독립운동으로 9차례 투옥되며, 도합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었다. 1924년 <조선일보>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였고, 이후 발행인, 편집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총무로 선임 1930년 백두산에 오르고 <백두산등척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여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론을 <조선일보>에 연재시켰다. 또한 1934년 단군 유적지인 구월산을 답사한 후 <구월산등람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위당 정인보와 함께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4년 여에 걸쳐 교열·간행하였다. 1946년 1월 상해임시정부 주도하의 ‘비상국민회의’ 주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7년 2월 미군정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9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저서로는 《백두산등척기》(1931), 《조선상고사감》(1947~1948),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 《한민족의 기본진로》(1949), 《민세안재홍선집》(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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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섭 (지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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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0년 1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30년 이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그 후 모교에서 재직했다. 1932년부터 2년간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하고, 그 후 중국 베이징에 거주했다. 작품으로 소설 이외에 수필 수십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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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호는 여천(黎川), 필명은 백목아(柏木兒)다. 1909년 안동군 원촌리에서 5형제 중 넷째로 출생했다. 이황의 14대손이며, 이육사 시인의 동생이기도 하다. 대구의 교남학교에서 공부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시 <전영사>가 입선하고, 1929년에는 역시 ≪조선일보≫에 소설 <탈가>가 선외가작으로 뽑힌다. 1930년에는 대구청년동맹 인사들인 박명줄, 문영식, 이경조, 대구신간지회 서무부위원 이강옥 등과 함께 일제에 검거된다. 그해 9월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도쿄 니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고 1932년에는 호세이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1935년 졸업논문 <앙드레 지드 연구>를 발표했다. 이후 귀국하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이원조는 스스로를 카프 일원이 아니라고 밝히지만 그의 활동은 카프와의 친연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주도적 이론가로 활동한다.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조선문학가동맹의 서기장,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낸다. 1946년부터 미군정에 의해서 공산당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조직을 지하화하고 결국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월북한다. 그는 남로당 출신 중 유일하게 북로당에 입당하여 1951년 6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부부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1953년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과정에서 임화, 설정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 선동 행위로 기소되어 징역 12년형을 선도받고 1955년 3월에 평양교화소에서 옥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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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 (엮은이)    정보 더보기
강화도에서 태어나 역사와 문학의 정기를 받으며 자랐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고전문학 비교 연구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폴란드 바르샤바 대에서 수년 동안 폴란드 학생들을 가르쳤고, 2008년부터 지금까지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에 한국출판학술상을 수상했고, 방문학자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2015)와 미국 하버드대학교(2023)를 다녀왔다. 고전소설 연구를 중심으로 하면서 근대문학, 문학사, 구비문학, 비교문학, 서지학, 문학교육학을 또 다른 거점으로 삼아 분과 학문적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다. 주요 저서 <파란·폴란드·뽈스까!-100여 년 전 한국과 폴란드의 만남, 그 의미의 지평을 찾아서>(소명출판, 2005,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학술도서) <16∼19세기 서적중개상과 소설·서적 유통관계 연구>(역락, 2007, 대한민국 학술원 선정우수학술도서) <조선의 베스트셀러-조선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프로네시스, 2007)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 2008) <마지막 서적중개상 송신용 연구>(보고사, 2009, 대한민국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역사영웅서사문학의 세계>(서울대 출판부, 2009) <백두용과 한남서림 연구>(역락, 2013, 대한민국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얼굴나라>(계수나무, 2013,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 <쾌족, 뒷담화의 탄생-살아있는 고소설>(푸른지식, 2014, 세종도서 교양나눔 우수도서) <세책, 도서 대여의 역사>(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박지원 읽기>(세창미디어, 2018) <비엔나는 천재다>(글누림, 2019) <강원도와 금강산, 근대로의 초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 여행기를 읽다>(강원학연구센터, 2021) <근대의 금강산과 강원도, 그 기록의 지평>(소명출판, 2022) <18세기의 세책사-소설 읽기의 시작과 유행>(문학동네, 2023) 등. 주요 역서 <여용국전/어득강전/조충의전>(지만지, 2010), <춘풍천리>(지만지, 2011), <옹고집전>(휴머니스트, 2016), <방한림전>(휴머니스트, 2016), <서산대사전>(지만지한국문학, 2023), <병인양요, 일명 한장군전>(지만지한국문학, 2024), <책쾌 조신선 이야기>(지만지한국문학, 202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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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다시 경부선 열차를 탔다. 시시각각으로 접근하는 남쪽 지방의 봄 빛깔은 앉아서 산수의 묘경에 노닐게 하는 듯 하다. 청일전쟁의 명소로서 우리들 기억에 남아 있는 성환역 부근에서는 벌써 눈록을 바라보는 몇 그루의 수양버들을 보았다. 속요에 나오는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강에 오니 황량한 촌락에 살구꽃이 만발했고 개나리꽃은 더욱 한창이다.
신탄강 입구에서 두건을 쓴 사공이 좁고 긴 목선에다가 네다섯 명 되는 흰 옷 입은 남녀를 싣고 맑고 푸른 강물을 건너려는 것을 보며 무르녹은 시취에 잠기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행로 중 알 수 없는 피안을 상징하는가? 하고 생각하면 묘연한 감정과 생각이 형언할 길 없다.
- 안재홍의 <춘풍천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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