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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
· ISBN : 9788994418193
· 쪽수 : 255쪽
· 출판일 : 2010-11-23
책 소개
목차
어머니의 문안 전화 - 서석화
예술가 아들의 삶 - 이순원
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 - 박완서
집착과 울컥으로부터의 도피 - 이재무
태환이 형, 진짜 미안해! - 김용택
언제 한번 봐 - 이승우
아이 - 구효서
반성은 자기 돌아봄이다 - 장석주
이까짓 풀 정도야 - 안도현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 - 서하진
내 기억 속의 음화 - 은미희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한 여섯 가지 반성 - 고운기
엄마의 나쁜 딸 - 차현숙
사소한 계란말이의 기억 - 김이은
너무나 안전했던 대구 - 우광훈
일곱 가지 새똥 같은 이야기 - 김규나
오르한 파묵의 바늘 - 공애린
휴강한 죄 - 김종광
상수리나무 [역?]를 찾아서 - 고형렬
욕먹고 나면 더 잘하게 돼 - 권태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다음날 아침에 요양원 원장 사모님이 어머니 핸드폰과 충전기를 가져오셨다.
“사실 그저께부터 기침이 심하셨는데 그냥 감기려니 했지요. 그런데 어제 보니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자력으론 호흡이 불가능해 얼굴이 시퍼렇게 뜨며 붓는데 이러다 정말 일 당하는 건 아닐까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으로 모시고 왔는데 한사코 따님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응급실에서 대기하다가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올라가시는 걸 보고나서야 몰래 전화를 드린 거예요. 상태가 위중하니 보호자를 빨리 부르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도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어제 늦게 제가 돌아간다고 인사를 하니 내일 핸드폰을 꼭 갖다달라고 부탁하시더라고요. 딸한테 전화를 못하면 걱정할 거라고요. 벌써 이틀째 전화를 못했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냐 하시면서요. 그래서 가져왔어요.”
그래서 이틀 동안 어머니의 문안 전화가 오지 않았었구나. 만약 내가 전화를 해봤더라면 조금이라도 상태가 덜 나빴을 때 어떤 조치라도 취해졌을 텐데……. 겁이 나서, 무서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뒤에 맞고 싶어서 나는 핸드폰을 들지 못했다.
어머니의 핸드폰을 받아 폴더를 열어 통화 버튼을 눌러본 순간 나는 핸드폰을 가슴에 안은 채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온통 내 이름뿐인 통화 내역. 하루 한 번 아침 10시에 딸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낙이었을 어머니의 가난한 시간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떨고 있었다.
사모님이 돌아간 뒤 나는 중환자 보호자실에서 내 핸드폰과 어머니 핸드폰을 동시에 열어보았다. 우리 엄마라는 이름 외에 다양한 이름으로 걸려오고 또 내가 건 통화 내역이 저장된 내 핸드폰과, 열흘 전에도 그 전에도 내 이름으로만 발신된 어머니 핸드폰. 하루 한 번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하루치의 안부를 주고받았다는 안도감과 해방감 속에서 아침 10시 이후에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는 자각이 뼈아프게 밀려왔다.
어머니 핸드폰이 내 이름으로 개설된 거라 요금도 당연히 내가 내는 것을 알고 계신 탓에 아침에 한 번 전화를 하시면서도, 행여 요금이 많이 나올까 걱정하시던 어머니.
“오늘은 안 해야지 하면서도 내 딸 목소리는 들어야 살 것 같아서 또 했다.”
“안 하기는 왜 안 해요? 엄마 전화 받아야 나도 살 수 있는데?”
“통화료 많이 나올까 봐 그러지.”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루 몇 번이라도 엄마 하고 싶을 때 해.”
“그래도 그건 안 돼지. 하고 싶을 때마다 하면 하루 열 번은 해야 될 거다, 아마.”
- <어머니의 문안 전화> 중에서
“너는 뒤따라오너라.”
거기에서 내게 가방을 넘겨준 다음 어머니는 두 발과 지게 작대기를 이용해 내가 가야 할 산길의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몸뻬 자락이 이내 아침 이슬에 흥건히 젖었다. 어머니는 발로 이슬을 털고, 작대기로 이슬을 털었다. 그렇다고 뒤따라가는 내 교복 바지가 안 젖는 것도 아니었다. 신작로까지 10분이면 넘을 산길을 20분도 더 걸려 넘었다. 어머니의 옷도 그 뒤를 따라간 내 옷도 흠뻑 젖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품속에 넣어온 새 신발을 내게 갈아 신겼다.
“앞으로는 매일 털어주마. 그러니 이 길로 학교를 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나 혼자 갈 테니까.”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머니가 늘 이슬을 털어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날 가끔 그렇게 내 학교 길의 이슬을 털어주셨다. 또 새벽처럼 일어나 먼저 이슬을 털어놓고 오실 때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어머니가 이슬을 털어주신 길을 걸어 지금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올해 어머니는 일흔셋이시다. 돌아보면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내 살아온 길 고비고비마다 이슬털이를 해주셨다. 아마 그렇게 털어내주신 이슬만 모아도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오래오래 사세요, 어머니.
아들은 어른이 된 뒤에야 그때 어머니가 털어주시던 그 이슬털이의 의미를 깨달았다.
- <예술가 아들의 삶> 중에서
지어먹은 마음이 아니라 저절로 오랫동안 지켜온 절약정신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음식물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어려서부터 농사짓기의 어려움과, 곡식으로 된 것은 쉰밥도 버리지 못하고 씻어먹는 걸 보아온 데서 비롯된 원초적인 죄의식 때문일 터이다. 내 몫은 남의 집에서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고, 손님을 치르고 남은 음식도 걷어두었다가 몇 날 며칠을 그것만 먹다가 다 먹은 후에야 새 음식을 만드는 버릇 때문에 자식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았다. 엄마 몸이 쓰레기통인 줄 아느냐는 혹독한 소리까지 들었다. 자식들이 그러건 말건 그 버릇만은 좋은 버릇인 줄 알았는데 이참에 고쳐야 할 것 같다. 화면이 그 끔찍함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준 탓도 있겠지만 만두 속 만드는 과정을 보고 욕지기가 치밀면서 저런 사람 중 대표적인 한 명 정도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살의에 가까운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먹는 거라면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이 늙은이를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창피스러운 나머지 죽는 날이나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음식은 지딱지딱 버리고 새로 사먹는 게 젊은 사람 마음에 드는 일도 되고 농사짓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도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내 자본주의 공부는 끝도 없어라.
- <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 중에서